빈부격차/ 갑을관계/ 스펙차별
최근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복지 강화, 갑을관계에서의 갑질 방지, 학벌 및 스펙 위주의 직원 채용 관행 폐지 등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듣게 된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그것이 꼭 옳은 방향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우선 빈부격차 해소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는 필요악이다. 모두가 다같이 잘 사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사람들은 누구나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고, 어찌 보면 빈부격차야말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복지"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이 도태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정글과 인간 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니까. 그런데, 최근 이 복지라는 개념에 심각한 오해가 생긴 것 같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기본적인 원칙은 개개인의 구성원이 경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는, 도저히 경쟁이 불가능한 처지에 있는 일부 계층에 대해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게 되면, 사회 구성원들의 동기부여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언론 등을 통해 보여지는 최근의 추세는, 복지라는 것이 "못사는 사람도 잘사는 사람과 동일한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즉, 입을 옷이 없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옷가지를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자들이 입는 더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옳은 방향일까?
갑을관계 역시 비슷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든 갑을관계는 존재해왔다. 더 큰 협상력을 가진 쪽이 그렇지 못한 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돈이든 지위든, 자신이 가진 "갑"으로서의 위치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사회가 운영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 중의 하나다. 이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또한,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을이 갑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면 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거나 갑의 요구를 무작정 들어줄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비록 겉으로는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을 역시 갑을관계를 통해 이익을 얻게 된다. 그 어떤 을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을 갑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갑의 행동이 도를 지나쳐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국가의 개입과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 바로 이러한 경우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갑을관계까지 모두 척결해야 할 비합리적인 관행으로 몰아간다면, 이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벌과 스펙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요즘 스펙차별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다. 학벌 및 스펙과 개인의 능력은 별개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여론에 못 이겨 "표면적으로는" 학벌과 스펙을 보지 않는 회사들도 늘어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일단, 학벌 및 스펙과 실질적인 능력이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나도 동의한다. 문제는 "100%"는 아닐지 몰라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90% 이상이 아닐까 한다.) 학벌과 스펙은, 결국 그 사람이 "학창시절에 공부를 얼마나 잘했고 어떤 성취를 이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즉, 학벌과 스펙을 갖춘 사람은, 최소한 "지적 능력"과 "성실성" 두 가지는 검증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학벌과 스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나?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어차피 제한적인 자기소개서나 면접을 통해서는 한 인재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뭔가 객관적인 지표가 필요한데, 학벌이나 스펙 외에는 딱히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표가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결국 학벌과 스펙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이는 완벽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다. 학벌 및 스펙 위주의 채용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고졸 출신이 SKY 졸업자보다 뛰어난 인재일 확률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나? TOEIC 500점인 사람이 TOEIC 900점인 사람보다 영어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학벌이나 스펙을 무시한다면, 입사지원자들을 평가할 뭔가 다른 기준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나? 미사여구로 장식한 자기소개서나, 고작 20~30분 가량의 면접 시간 동안 보여주는 말솜씨 따위가, 십여 년간의 노력으로 성취한 학벌과 스펙 보다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나?
결론적으로 빈부격차, 갑을관계, 스펙차별 등이 무조건 청산해야 할 사회 암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정치인들의 "포퓰리즘" 행태다.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갑보다는 을이, 고스펙자보다는 저스펙자의 숫자가 많은 것이 현실이고, 표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정책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인기를 끌만 한 정책에 매몰되는 정치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다수결 또는 여론에 따라 판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지지하는 사람의 숫자와 관계 없이 내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 PS: 이런 글을 쓰고 보니, 마치 내가 부잣집에서 태어나 명문대 졸업하고 갑질만 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오해받을지 모르겠다. 물론 전혀 아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중위권 대학 졸업하고 전형적인 을의 역할인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다만, 내 처지와 상관 없이 어느 것이 옳은 방향인지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