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운전
얼마 전 버스 기사와의 사소한 시비로 인해, (좀 거창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일단,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내가 운전 중이었고, 한 버스가 매우 위험하게 끼어들었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차들이 없었기 때문에, 급히 차선을 바꿔 피할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화가 났고 매우 길게 경적을 울렸다. 버스도 이에 질세라 같이 경적을 울렸다. 사실, 거기까지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화가 났다. 잘못을 저지른 쪽이 오히려 경적을 울려대니, 화가 많이 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화를 참지 못하고, 버스 앞에 잠깐 차를 세워서 버스의 주행을 방해했다. 부끄럽지만 전형적인 보복운전을 한 것이다. (단, 정말 솔직히 말하는데, 위험을 느낄 정도의 급정거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앞쪽 신호등에 정차를 하게 됐는데, 역시 함께 정차한 버스 기사가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서로 (욕설까지는 아니지만) 고함을 치며 말다툼을 했고, 신호가 바뀌자 버스 기사는 가버렸다.
그런데, 당시 버스 기사의 표정이 약간 신경 쓰였다. 뭔가 "두고 보자" 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훨씬 젊은 내가 반말로 소리를 쳤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복운전은 단순 법규 위반과는 달리 형사처벌이 가능한 범죄다. 그리고 버스에는 당연히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버스 기사가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지우고, 내 보복운전 부분만 편집하여 경찰에 신고한다면, 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조금만 참을걸 괜한 짓을 했구나… 등등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일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맴도는 과정에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크게 화를 내고 경적을 울리고 보복운전을 한 것이, 단순히 버스 기사의 위험한 끼어들기 때문이었을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묻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단순히 운전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면, 상대가 비싼 외제차라고 해도 내가 화를 내는 정도는 똑같아야 한다. 그러나, 솔직히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비싼 외제차를 몰 정도라면, 돈이든 지위든 상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일 가능성이 크고, 경우에 따라서는 운전자가 조폭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히 내 행동은 훨씬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즉, 내가 화를 내고 보복운전을 한 진짜 이유는, "운전"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버스기사에 대한 "무시"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버스 기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돈 많고 빽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버스 기사는 대부분의 경우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의 아저씨들이다. 설사, 상황이 악화되어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180cm/95kg에 달하는 30대 후반(당시 기준)의 건장한 남자인 내가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요약하면, 상대방(버스 기사)이 먼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상대방이 돈 없고 배경 없고 육체적으로도 나보다 열등하다는 판단이 깔려있었기 때문에, 내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던 것이다. "강자 앞에 약해지고, 약자 앞에 강해지는" 너무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굳게 다짐했다. "강자 앞에서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약자 앞에서 강한 척 하지 말자"라고. 사실 강자 앞에서 약해지는 것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행동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민망한 행동일 수는 있겠으나, 절대로 비난 받을만한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약자 앞에서 강해지는 것은 분명 스스로의 선택이며, 얼마든지 그러지 않을 수 있음에도 스스로를 추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짓을 했다. 너무 부끄럽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말 노력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