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능
중년의 나이가 되어 새해를 맞았다. 특별한 질병이나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딱 인생의 절반쯤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 인생을 돌아보면 많은 아쉬움과 후회를 느낀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실패의 경험은 수능이다. 전혀 의미 없는 신세한탄이지만, 당시 상황을 한번 적어보고 싶다.
내가 수능에서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내 공부 스타일과 정부의 변화된 수능 난이도 정책이 상극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히 운이 없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모든 것이 "오직" 불운 때문만은 아니었고 당연히 내 잘못도 있었다. 그러나, 운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내 공부 스타일은 선택과 집중에 특화되어 있었다. 잘하는 과목은 완벽하게 준비하고, 못하는 과목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못하는 과목에서 잃은 점수는 잘하는 과목에서 만회한다. 이 스타일의 특징은, 시험의 난이도가 높든 낮든 일정한 수준의 점수가 나온다는 점이다. 잘하는 과목은 준비가 잘 되어 있으니, 시험 문제가 쉽든 어렵든 항상 높은 점수가 나온다. (쉽든 어렵든 어차피 다 아는 문제다. 결과적으로 항상 만점에 가까운 점수가 나온다. 단,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만점 이상으로 추가 점수를 주는 것은 아니니까, 시험이 쉬워도 점수가 크게 올라갈 여지가 적다.) 반대로, 못하는 과목은 준비가 잘 안되어 있으니, 시험 문제가 쉽든 어렵든 항상 낮은 점수가 나온다. (어차피 공부를 안 한 사람에게는 다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시험이 아무리 쉽거나 어려워도 찍어서 맞출 확률은 비슷하다. 물론, 내가 전혀 공부를 안 하고 다 찍었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이런 스타일을 가진 수험생 입장에서는 시험이 어려울수록 유리하다. 내 점수는 일정하지만 경쟁자들의 점수가 낮아질 테니까.
반면에,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전 과목을 두루두루 공부하는 스타일은 시험 난이도에 따라 점수 변화가 심하다. 아는 문제가 많이 나오느냐 모르는 문제가 많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일의 수험생에게는 당연히 시험이 쉬울수록 유리하다.
그리고, 98학번 수능은 정부가 급격하게 쉬운 난이도를 도입하기 시작한 첫 수능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보니, 전체 평균 점수가 전년도에 비해 무려 41.8점이나 올랐다고 한다. (예를 들어, 수능 전 모의고사에서는 300점이면 상당히 높은 점수였으나, 실제 수능에서 300점은 지극히 평범한 점수가 되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동일하게 쉬운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기계적인 공평함은 보장되었지만, 급격한 난이도 변화로 인해 수험생별로 유불리가 존재했던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이유로 인해 나에게는 극단적으로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전체 평균이 40점 가량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수치화할 수는 없겠으나) 내 점수 상승폭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결국, 전교 1등까지 해봤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던 내가, 그냥 평범한 중위권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참고로, 내 고향은 고교 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명문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한 고등학교에서 서울대에 두세 명 정도 입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할 정도면… 나는 충분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어버린 뼈아픈 실패였다. 물론, 그 이후로도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본격적으로 인생의 쓴 맛을 느껴본 첫 경험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