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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David Shin's blog, created with:

About

나는 대한민국 국적의 40대 남성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다. 특별히 글쓰기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뭔가 생각해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욕구가 강한 편이다.

그래서 여러 블로그 서비스를 전전하다가, 언젠가부터 웹페이지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블로그다. 화려하게 꾸밀 능력도 없고, 개인적으로 단순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해서, 이 정도면 만족한다.

어느 블로그나 마찬가지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적어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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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20240811

Title: "Mount & Blade: Warband"
Date: 11 AUG 2024
Tags: +game +전쟁 @리뷰

Post20240519

Title: "무의미한 비교"
Date: 19 MAY 2024
Tags: +tech +리뷰 @비교

Post20240811

Title: "Mount & Blade: Warband"
Date: 11 AUG 2024
Tags: +game +전쟁 @리뷰

영화나 게임 등의 매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테마는 중세 배경의 전쟁물이다. 사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주제여서 관련 작품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 오늘은 <Mount & Blade: Warband>라는 게임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일단 전쟁과 관련된 게임 장르는 크게 "전략" 게임과 "액션" 게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략 게임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군대(또는 국가)를 지휘 및 운영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고, 액션 게임은 미시적인 관점에서 한 개인이 직접 전장에서 전투를 벌이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플레이했던 전략 게임은 너무나 유명한 KOEI사의 <삼국지 2>라는 작품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정말 최고의 게임이었고, 약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다만, 현장감 측면에서는 액션 게임에 비해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삼국지 2>의 문제라기 보다는 전략 게임의 태생적 한계였다. 반면에 액션 게임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현장감은 뛰어나겠으나, 군대를 지휘하고 운영하는 요소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삼국지를 즐기던 당시에, 이와 같은 전략 게임을 개인 시점으로 만들되 액션 게임처럼 단순히 혼자서 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 지휘나 운영, 내정 및 외교 등의 거시적 관점의 상호 작용도 개인 시점에서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과 매우 유사한 방식의 게임이 이미 나와있었다. 그 게임이 바로 <Mount & Blade: Warband>다.

2010년에 출시된 <Mount & Blade: Warband>는 2008년작 <Mount & Blade>의 확장팩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확장팩이라기 보다는 리마스터로 보는 것이 맞다. 단순히 <Mount & Blade>에 무언가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원작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Mount & Blade: Warband>는 원작의 후속작이 아니라 "대체작"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어쨌든 <Mount & Blade: Warband>는 앞서 언급했던 거시적 전략, 미시적 액션, 국가 운영, 캐릭터 육성, 거기에 스토리까지 모두 갖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게임이다. 물론, 각각의 요소들이 모두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다양한 요소를 하나로 합친 게임은 <Mount & Blade: Warband>가 거의 유일하다. "Calradia"라는 가상의 대륙(단, 판타지 요소는 전혀 없고, 현실의 중세에 기반한 지극히 사실적인 세계관이다.)에서 일개 떠돌이 용병부터 시작하여 영주를 거쳐 왕까지 될 수 있는 방대한 내용, 그 과정에서 개인으로서의 전투와 부대 단위의 지휘를 모두 경험하면서, 나중에는 영지 및 국가 운영과 외교까지 관리해야 하는 이 게임은, 중세 전쟁물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궁극의 게임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이 게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미 출시된지 10년이 넘게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이미 <Mount & Blade 2: Bannerlord>가 발표된 상태였고, 그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Mount & Blade: Warband>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Mount & Blade: Warband>라는 게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게임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어차피 내 PC 사양으로는 비교적 최근 작품인 <Mount & Blade 2: Bannerlord>를 플레이할 수 없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Mount & Blade: Warband>를 시작하게 됐는데,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게임이었다.

중세 전쟁물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보면, 거의 인생 최고의 게임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오래된 게임이기 때문에 그래픽은 보잘것 없지만, 어차피 그래픽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취향이기도 하고, 구식이지만 나름 조화로운 그래픽이라서 큰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면 꼭 플레이해 보기를 권한다.

# PS 1: 일단은 <Mount & Blade: Warband>를 실컷 즐기고, 몇 년 후에 PC를 업그레이드하면 그때 <Mount & Blade 2: Bannerlord>를 플레이할 생각이다. 그때 쯤이면 PC 사양도 올라갈 테고 <Mount & Blade 2: Bannerlord>도 이미 오래된 게임일 테니까, 플레이에는 문제가 없을 듯 하다. <Mount & Blade 2: Bannerlord>는 <Mount & Blade: Warband>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모든 면에서 발전된 게임이다. 당장 시작하지는 않겠지만, 정말 기대가 된다.

# PS 2: 참고로 <Battle Brothers>라는 게임이 있는데, <Mount & Blade: Warband>와 매우 유사하지만 2D 턴제 전투를 기반으로 제작된 게임이다. 분명 그 나름대로 매우 뛰어난 게임임에 틀림 없지만, 완벽하게 <Mount & Blade: Warband>의 하위 호환이라서, 조금 플레이하다 보면 오히려 <Mount & Blade: Warband>가 생각나기 때문에, 결국 <Mount & Blade: Warband>로 돌아오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타까운 느낌이 드는 게임이다. 그만큼 <Mount & Blade: Warband>가 뛰어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Post20240519

Title: "무의미한 비교"
Date: 19 MAY 2024
Tags: +tech +리뷰 @비교

많은 사람들이 업무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여러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동일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하고, 어떤 소프트웨어가 나에게 적합할지 판단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중간에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인터넷 등을 통해 어느 것이 더 나을지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나는 단순 리뷰 보다는 비교하는 글을 많이 찾아보는 편이다. (Ex: Debian vs Fedora, Emacs vs Vim 등) 그런데, 이런 글들은 대게 별다른 결론 없이 끝나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처음에는 피상적인 정보만 나열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양쪽 다 장단점이 있으니 뭐가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사용자의 취향 따라 선택하라"는 내용으로 마무리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항상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주관적인 의견을 말해야 할 상황에서 조차 불필요한 중립성을 유지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완전히 객관적인 의견이나 글은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글을 읽는 사람은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알고 싶었을 텐데, 결국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고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글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책임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이라도 좋으니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명확히 언급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이 필자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는 않을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 단지 참고하기 위해 글을 읽는 것인데, 이처럼 결론이 없다면 아예 참고할 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 PS: 소프트웨어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위와 같은 현상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같은 장르의 게임을 비교하거나, 핸드폰 모델을 비교하거나, 비슷한 등급의 차량을 비교할 때도 "난 이쪽이 더 좋아!"라고 명확하게 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List2023

Post20230611

Title: "GOAT King James"
Date: 11 JUN 2023
Tags: +sports +농구 @르브론제임스

Post20230330

Title: "은하영웅전설"
Date: 30 MAR 2023
Tags: +book +다나카요시키 @리뷰

Post20230306

Title: "The Callisto Protocol"
Date: 06 MAR 2023
Tags: +game +공포 @리뷰

Post20230201

Title: "기계가 인간을 대신할 수 있을까?"
Date: 01 FEB 2023
Tags: +tech +인공지능 @ChatGPT

Post20230116

Title: "Emacs를 사용하는 이유"
Date: 16 JAN 2023
Tags: +tech +TextEditor @리뷰

Post20230107

Title: "낙법의 역설"
Date: 07 JAN 2023
Tags: +sports +유도 @낙법

Post20230103

Title: "인기 드라마"
Date: 03 JAN 2023
Tags: +drama +졸작 @시청률

Post20230101

Title: "우영우와 현실"
Date: 01 JAN 2023
Tags: +drama +우영우 @장애

Post20230611

Title: "GOAT King James"
Date: 11 JUN 2023
Tags: +sports +농구 @르브론제임스

르브론 제임스(LeBron James, LA Lakers)는 모두가 아는 NBA 리그의 수퍼스타다. 그동안 아무도 넘보지 못했던 GOAT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에게 도전하는 유일한 대항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는, 불멸의 기록으로 여겨졌던 카림 압둘자바(Kareem Abdul-Jabbar)의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드디어 갈아치웠다.

MJ와 LBJ를 간략히 비교해 보자. MJ가 완벽에 가까운 SG였다면, LBJ는 MJ 보다 더 큰 신체 조건을 갖췄음에도 뛰어난 BQ와 패스 능력을 겸비하여 PG부터 C까지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포지션에서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다방면에 두루 뛰어나다. (MJ가 Specialist라면 LBJ는 Generalist라고 볼 수 있는데, 어느 한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LBJ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극한의 자기 관리로 장기간 리그 최고 수준의 실력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수많은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시즌 MVP, 우승, 파이널 MVP 등등)

종목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운동 선수는 20세 전후에 경력을 시작해서 30세 전후에 전성기에 도달했다가 대략 35세쯤 은퇴한다. 물론 35세까지 꾸준히 실력을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30세 전후부터 서서히 하락하다가 은퇴 시점에는 당연히 실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인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LBJ는 40에 가까운 나이(한국 나이로는 이미 40세)에 아직도 뛰고 있는데, 단순히 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력이 여전히 리그 최고 수준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물론 늦은 나이까지 뛰는 선수들이 종종 있지만, 그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을 유지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왕년의 수퍼스타 빈스 카터(Vince Carter)는 43세까지 뛰다가 은퇴했지만, 커리어 후반에는 어디까지나 벤치 선수로 뛰었을 뿐이다. 그런데 LBJ는 여전히 리그 최고 수준에서 경쟁을 하고 있으니...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최전성기 구간의 실력은 MJ가 더 뛰어났고 팀의 리더로서도 더 나았던 것 같다. 실제로 팀 성적은 쓰리핏 2회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한 명의 농구 선수로서 경력 전반에 걸쳐 보여 준 개인적인 능력과 성취로 보면, 역사상 LBJ 보다 나은 선수는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LBJ가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한 시점부터, 이제 GOAT는 LBJ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물론,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생각하는 GOAT는 LBJ다.

Post20230330

Title: "은하영웅전설"
Date: 30 MAR 2023
Tags: +book +다나카요시키 @리뷰

<은하영웅전설> - 다나카 요시키

나는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을 정말 좋아했다. 고등학교 시절 자율학습 시간에 미친 듯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외전까지 포함하면 십여권에 이를 정도로 길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오히려 짧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순수하게 재미로만 따지면 내가 평생 동안 읽은 책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당시에는 단순히 재미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해 상당히 철학적인 고찰을 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다. 중우정치로 망가진 민주주의와 천재가 이끄는 군주제의 대결이 이야기의 기본 흐름이었는데, 이 책 내용만 보면 군주제 쪽이 나아 보였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 지식과 경험이 늘어난 시점에 돌아보니, 상당히 허점이 많은 소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는 보기 드문 최악의 인물로 설정하고, 반대로 제국의 황제는 하늘이 내린 천재로 설정함으로써, 애초에 공정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즉, 당연히 군주제 쪽이 좋아 보일 수 밖에 없도록 의도된 소설이었다. (작가가 일본인이라서 그런 걸까?)

물론 현실에서도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나라를 망치기도 하고 유능한 왕 또는 독재자가 나라를 부흥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민주주의에는 "선거"라는 최소한의 필터링이 존재하지만 왕 또는 독재자에게는 그런 안전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함량 미달의 지도자가 정권을 잡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민주주의에는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한다. (탄핵, 임기 제한 등) 결과적으로 지도자가 국민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반면에, 왕 또는 독재자가 함량 미달이라면,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수 밖에 없다. (혁명, 쿠데타 등)

즉, 민주주의가 더 낫다는 것이 명확하다. 인류가 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발전해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결국, <은하영웅전설>은 어디까지나 오락소설일 뿐이다. 그냥 재미로 읽고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Post20230306

Title: "The Callisto Protocol"
Date: 06 MAR 2023
Tags: +game +공포 @리뷰

출시 전부터 많은 기대를 했었고, 출시 직후 구매하여 틈틈이 플레이하다가, 드디어 <칼리스토 프로토콜 The Callisto Protocol>의 엔딩을 봤다. 아주 간략히 설명하자면, <칼리스토 프로토콜>은 개발 당시부터 <데드 스페이스 Dead Space>의 "정신적 후속작"으로 불렸던 게임으로, 고전 명작 <데드 스페이스>의 원 개발자가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개발하는 작품이기에 전 세계적인 기대를 받았고, 한국 자본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 더 큰 관심을 받았다. 출시 이후에는 여러 단점이 부각되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며, 마침 비슷한 시기에 출시되어 크게 성공한 <데드 스페이스 리메이크>에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다수의 리뷰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했던 문제점들을 꼽아보면, 대략 "독창성의 부족", "단조로운 전투", "최적화 실패"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가 직접 플레이하면서 느낀 점을 적어보고 싶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다.)

먼저 독창성이 부족한 것은 맞다. 기본적으로 고전 <데드 스페이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 외 다른 유명 게임들을 모방한 듯한 부분도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꼭 독창적이어야만 하는 걸까? 어차피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칼리스토 프로토콜>이 모방한 <데드 스페이스> 역시 다른 게임 또는 영화 등을 모방하여 개발됐다. (단, 내가 말하는 "모방"은 "표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표절"은 범죄다.) 즉, 독창성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독창적이지 못한 소재라 하더라도 이를 잘 엮어서 재미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칼리스토 프로토콜>의 설정이나 스토리가 특별히 부족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투가 단조로운 것도 사실이다. 게임에서 최초로 마주치게 되는 가장 약한 몬스터부터,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는 최종 보스까지, 전투 방법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물론, 몬스터 종류별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조금씩 달라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부분이고 큰 흐름은 항상 동일하다. 뭐랄까... 약간 성의가 없어 보이는 디자인이었던 것 같다. 다만, 동일한 방식의 전투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니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올라가게 되고, 결과적으로 어려운 전투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지 않았던 것은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칼리스토 프로토콜>이 받았던 가장 큰 비판은 최적화에 대한 것이었다. 다만, 내가 워낙 저사양 PC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게임이 다소 버벅거려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칼리스토 프로토콜>의 경우에는 사양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콘솔로 플레이했기 때문에, 최적화 문제를 체감하지는 못했다. (내가 느끼지 못했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칼리스토 프로토콜>을 변호하는 내용이 됐는데, 사실 내가 생각하는 문제점은 따로 있다. 바로 스토리의 "완급 조절"이다. 이 게임의 플레이 타임은 대략 10시간 정도인데, 나는 13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여느 게임과 마찬가지로, 게임 시작 시점의 주인공은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배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싸우게 된다 (기). 그 과정에서 여러 정보를 모아 진실에 접근해 나가다가 (승), 결국에는 모든 비밀을 밝혀내고 (전), 그 음모를 분쇄한다 (결). 문제는, 내 플레이 타임 총 13시간 중에서 (기) 부분만으로 10시간가량이 지나갔다는 점이다. 즉, 아무 정보도 없고 이유도 모르는 지루한 싸움을 10시간이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뭔가 좀 진전이 있다고 느껴지는 시점이 되면, 갑자기 진행 속도가 정신없이 빨라져서, 3시간 동안 (승)-(전)-(결) 부분이 모두 지나간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스토리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토리의 완급 조절에는 명백히 실패했다.

결론적으로, <칼리스토 프로토콜>을 명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졸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범작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는 게임이다.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조금 느긋하게 플레이한다면 충분히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Post20230201

Title: "기계가 인간을 대신할 수 있을까?"
Date: 01 FEB 2023
Tags: +tech +인공지능 @ChatGPT

최근 ChatGPT가 화제다. 전문적으로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정말 엄청난 기술적 진보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와 같은 기술적 진보가 단순한 흥미거리를 넘어서 정말로 인간의 손길을 대체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먼 미래에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가까운 미래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지금 와서 돌아보면 ChatGPT에 비해 초보적인 수준의 기술이지만, 처음 선보였을 당시에는 그에 못지 않게 충격적이었던 기술이 바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번역기"다. 초기에는 어색하고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자동으로 번역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고,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결과 이제는 꽤나 매끄러운 수준의 번역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상당한 발전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번역기만을 사용해 번역하고 출판한 책은 우리 나라에 단 한 권도 없다는 점이다. 기업에서도 해외 고객사에 제출할 자료를 번역기로 번역하는 일은 결코 없다. (아주 간단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이메일을 보내는 경우나, 정말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이 전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영세 기업 등은 제외하자.)

그 이유가 뭘까? 그건 기계가 아무리 높은 수준에 도달한다고 해도 "검증"과 "책임"의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을 대신할 방법이 딱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기를 아무리 개선하고 발전시켜도, "만에 하나 틀릴 경우"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방법이 없다. 즉, 이를 검증하기 위해 또 다시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추후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역시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다.

또 다른 예로 자율 주행 자동차가 있다. 뉴스를 통해 꽤나 긴 시간 동안 자주 접해온 기술인데, 왜 아직 상용화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인간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초보적인 수준의 자율 주행은 이미 상용화가 됐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자율 주행은, 인간의 개입도 필요 없고 별다른 제약도 없는 완전한 의미의 자율 주행이다.) 그 이유는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상황 속에서 인간과 같은 (또는 인간 보다 나은) 대응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발 상황에 대응하기 어려운 것은 인간 초보 운전자도 마찬가지 아닌가? 왜 인간 초보 운전자는 되고 자율 주행 자동차는 안되는 걸까? 그건 인간 초보 운전자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율 주행 차량도 탑승자에게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가능하지만, 그렇게 되면 탑승자가 운전에 신경을 쓰고 개입할 수 밖에 없다. 즉, 더 이상 완전한 의미의 자율 주행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역시나 검증과 책임의 문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 자체는 상대적으로 덜 어려운 것 같다. 정말 어려운 것은 검증과 책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ChatGPT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ChatGPT를 통해 99% 수준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해도 단 1%의 오류가 포함될 위험이 존재한다면, 이를 검증하기 위해 결국은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고, 검증한 사람은 그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다시 검증을 반복하는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부분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ChatGPT는 그저 흥미로운 장난감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Post20230116

Title: "Emacs를 사용하는 이유"
Date: 16 JAN 2023
Tags: +tech +TextEditor @리뷰

나는 텍스트를 많이 다루는 일을 한다. 그러나 흔히 사용하는 Microsoft Office나 LibreOffice 보다는 텍스트 에디터를 주로 사용한다. 일단 거의 모든 작업은 텍스트 에디터로 진행하고, 특정 포맷이 요구될 때는 Pandoc을 이용해 변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텍스트 에디터가 바로 Emacs다. (과거 Vim을 사용했던 적이 있지만, 결국은 Emacs에 정착했다.)

사실 나 스스로도 내가 Emacs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평생 동안 단순한 것을 추구하는 성향을 유지해 왔는데, Emacs는 그와 정 반대의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엄청나게 다양한 기능을 가졌지만 그 대신 매우 복잡하고 배우기 어려운 에디터가 바로 Emacs다. 반면에 Emacs의 라이벌이자 나도 한때 사용한 적이 있는 Vim은 상대적으로 적은 기능을 제공하지만 그 대신 단순하고 배우기 쉽다. 사실 내 성향으로 보자면 Vim과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데, 나는 왜 Vim을 포기하고 Emacs를 선택했을까? 몇 가지 떠오르는 이유들을 적어보겠다. (본의 아니게 Emacs vs Vim 비교 글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목적이 아니라 내가 왜 Emacs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먼저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은, 나는 여전히 단순한 것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현재 Emacs를 사용하고 있지만, 수많은 기능과 복잡함을 좋아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점들이 더 많기 때문에, Vim이 아니라 Emacs를 선택한 것이다.

  1. 직관성

    Emacs가 더 직관적이다. 복잡한 Emacs가 단순한 Vim 보다 더 직관적이라는 말을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다. Vim의 커서 이동 키는 그 유명한 h, j, k, l 방식이다. 각각의 문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키보드 상에서 오른손으로 쉽게 누를 수 있는 위치의 키를 배정한 것이다. 즉, 처음에는 문자적으로 그 의미가 와닿지 않아서 기억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손가락의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매우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반면에 Emacs에서는 커서 이동 키가 C-p, C-n, C-b, C-f​로 되어 있다 (C-​는 Ctrl 키를 함께 누르라는 뜻). 각각 previous, next, backward, forward​에 대응하는 문자들이다. 즉, 각각의 키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바로 알 수 있지만, 충분히 익숙해진 후에도 그렇게 편리하지는 않다. 이 것만 봐도 두 프로그램의 철학적 차이를 알 수 있다. 비단 커서 이동 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이와 같은 특징들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는 Vim의 효율성 보다 Emacs의 직관성을 선호한다.

  2. 개방성

    Vim은 오픈소스임에도 불구하고 Bram Moolenaar 한 사람에 의해 개발된다. (정말로 단 한 명이라는 뜻은 아니고, 당연히 함께 일하는 팀원들이 있겠지만, 사실상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는 이런 얘기를 한 적도 있다:

    INTERVIEWER: How can the community ensure that the Vim project succeeds for the foreseeable future?

    BRAM: Keep me alive.

    물론,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구조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향후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길 지 알 수 없고, 그 사람의 능력이 쇠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Emacs는 그런 부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GNU라는 공신력 있는 단체에서 다수의 개발자들이 참여하여 개발 및 관리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직관성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였지만, 개발 및 관리 주체에 대한 문제는 명백하게 우열을 가릴 수 있다. 당연히 Emacs가 낫다.

  3. 기반 언어

    Vim과 Emacs 모두 다양한 설정을 지원한다. 일반적인 Windows 프로그램들처럼 메뉴를 통해 설정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파일 포맷으로 설정을 저장 및 수정하는 방식이다. 그 설정 파일을 보관해 두면, 추후 다른 PC에서도 완전히 동일한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상당히 편리하다.

    이 설정 파일에는 당연히 나름의 규칙이 있어야 프로그램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데, Vim에서는 Vimscript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문제는, 이것이 범용 언어가 아니라 Vim만을 위해 만들어진 제한된 기능의 언어라는 점이다. 반면에 Emacs는 Elisp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는 사실상 완전한 형태의 범용 프로그래밍 언어로, Vimscript 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평가 받는다. (그래서 Emacs의 확장 기능이 대체로 Vim의 확장 기능 보다 뛰어나다.)

    당연한 얘기지만, Vim을 더 잘 활용하려면 Vimscript에 익숙해져야 하고, Emacs를 더 잘 활용하려면 Elisp에 익숙해져야 한다. 나는 프로그래머가 아니고, 관련 업계 종사자도 아니지만, 어차피 조금이라도 배워야 한다면 제한적인 전용 언어 보다는 더 강력한 범용 언어를 배우고 싶다. (물론,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므로, 취미 삼아 천천히 공부해볼 생각이다.) 이 부분 역시 명백하게 Emacs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위에 언급한 이유들 중에서 나에게 지금 당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 (1)번 하나 뿐이다. (2)번과 (3)번은 먼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래의 일이라 하더라도, 뭔가 불안 요소가 있는 프로그램을 내 인생의 주력 프로그램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Emacs를 선택한 것에 정말 만족하며 사용하고 있다. (이 블로그도 Emacs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Emacs에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Vim과 중복되는 장점은 굳이 상세히 적지 않았다. (Emacs와 Vim은 텍스트 편집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장기간에 걸쳐 오픈소스로 개발되어 왔기 때문에, 비슷한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특정 플랫폼에 종속적이지 않고, 플러그인 방식으로 확장이 가능하며, 두터운 사용자 층 덕분에 정보를 구하기 쉽다는 장점은 둘 모두에 해당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Emacs의 장점이 더 많이 알려져서 다양한 분야의 신규 사용자가 유입되면 좋겠다.

https://www.gnu.org/software/emacs

Post20230107

Title: "낙법의 역설"
Date: 07 JAN 2023
Tags: +sports +유도 @낙법

유도에서 낙법은 상대방의 기술에 걸렸을 때 자신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넘어지는 기본적인 방어법이다. 보통 제대로 낙법을 하면 시원하게 넘어가면서 큰 소리가 난다. 즉, 완벽하게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방어가 잘 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실제 유도 경기에서 그런 식으로 낙법을 하면 바로 한판패를 당한다는 점이다. 선수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므로, 기술에 걸렸을 때 낙법을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위험한 자세로 몸을 뒤틀면서 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점수를 적게 잃거나, 잘하면 아예 잃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말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경기 규칙 자체가 최선의 방어를 하면 패하게 되고, 오히려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면 점수를 잃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당연히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실전성에도 부합하지 않고 선수를 위험에 빠트리는 이런 규칙은 꼭 바꿨으면 좋겠다.

Post20230103

Title: "인기 드라마"
Date: 03 JAN 2023
Tags: +drama +졸작 @시청률

인기가 많다고 해서 질적으로 수준이 높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에 대한 평가에서 비슷한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수준이 낮아도 인기가 많을 수 있다. 평면적이고 단순한 캐릭터들과 클리셰로 범벅 된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의 졸작이라도, 인기 스타들이 나와서 사랑을 나누고 눈물 나는 신파 좀 보여주다가 부패한 권력자 또는 부자들을 벌하는 통쾌한 장면으로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해주면,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청자의 기호를 잘 파악해서 높은 시청률을 달성한 것 자체는 사업적인 측면에서 인정받을 만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서 아반떼가 페라리 보다 훨씬 잘 팔리지만, 그렇다고 아반떼가 페라리 보다 더 좋은 차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건, 어떤 드라마가 그런 식으로 인기를 얻으면 갑자기 무슨 대단한 명작 드라마로 대접받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Post20230101

Title: "우영우와 현실"
Date: 01 JAN 2023
Tags: +drama +우영우 @장애

얼마 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내 취향은 아니라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워낙 유명하다 보니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그렇게 접한 제한된 정보만으로도 아쉬움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서 한마디 하고 싶다.

이 드라마는 마치 장애인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포용하는 드라마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데... 정말 그런가? 우영우는 장애인이긴 하지만,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미모/ 비현실적으로 천재적인 두뇌/ 한국 사회 최상위 직업/ 거기에 더해 상당한 경제력까지 갖춘 (변호사니까) 캐릭터다. 즉,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외 모든 조건이 너무 좋아서 장애가 더 이상 장애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복 받은 사람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 크다. 진짜 장애인들이 이런 드라마를 보고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나에게 장애가 있고 그로 인해 힘든 삶을 살고 있다면, 이런 드라마를 봤을 때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 같다. 내가 이상한 걸까?

내가 보기에 우영우는 그냥 장애인을 소재로 재밌게 만든 드라마일 뿐, 뭔가 대단하고 심오한 철학을 기대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기대 이상의 인기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미화된 것 같다.

List2022

Post20220420

Title: "조국과 정호영"
Date: 20 APR 2022
Tags: +politics +정치인 @내로남불

Post20220331

Title: "Text Editor: Vim"
Date: 31 MAR 2022
Tags: +tech +TextEditor @리뷰

Post20220420

Title: "조국과 정호영"
Date: 20 APR 2022
Tags: +politics +정치인 @내로남불

정치권의 내로남불 행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여야를 가리지도 않는다. 그런 일이 생겨도 너무 흔해서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 최근 아주 재미있는 내로남불 이슈가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바로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정호영에 대한 내용이다. (존칭 생략)

이번 건이 특별히 재미있는 이유는, 대한민국 내로남불계의 끝판왕이자 사실상 윤석열 대선 승리의 일등 공신인, 조국 케이스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사회 지도층에 있는 부모가 자식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이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다.)

여기서 핵심은 각 당의 반응이다. 최대한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민주당은 과거 조국을 철저히 옹호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정호영은 마치 조국 케이스에서 이름만 바꾼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비슷한 의혹을 받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따지면, 조국을 옹호했던 민주당은 정호영도 옹호해야 한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조국을 극도로 비난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정호영도 비난해야 한다. 상식과 논리로 상황을 보면 그런 결과가 나와야 맞다.

그런데 각 당의 반응은 그와 정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은 정호영을 비난하고, 국민의힘은 정호영을 옹호한다. 결국 양당 모두 상식과 논리, 옳고 그름 따위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진영논리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까지 철면피일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신비로움마저 느껴진다.

# PS1: 정호영에 이어 한동훈도 비슷한 의혹을 받고 있다. 당연히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고, 개인적으로는 절대 장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쪽 분야의 선구자인 조국이 등판해서 연일 한동훈을 비난하고 있다. 그냥 웃음만 나온다. 물론, 한동훈과 정호영은 조국의 적이다. 그러나 적들이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자기 잘못이 상쇄되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조국은 그들을 비난해선 안된다.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을 안다면 말이다.

# PS2: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윤석열의 태도다. 문재인 정권은 조국을 감싸다가 무너졌고, 그 반사 이익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바로 본인이다. 그러면 당연히 문재인 정권의 실수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텐데,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동훈과 정호영을 그대로 임명해버리면 새 정권에 치명타가 될 것이고, 지명을 철회하면 국민들에게 "윤석열은 다르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오히려 인기가 올라갈 것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그런데 정치인들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Post20220331

Title: "Text Editor: Vim"
Date: 31 MAR 2022
Tags: +tech +TextEditor @리뷰

나는 텍스트를 많이 다루는 일을 한다. 주로 노트북을 사용해서 일하는데, 당연히 그에 맞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흔히 생각하는 대표적인 도구로 Microsoft Word나 LibreOffice Writer 같은 워드프로세서 종류가 있고, 전문 작가를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들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텍스트 에디터를 사용한다. 보통 텍스트 에디터는 프로그래밍에 주로 사용하지만, 일반적인 글쓰기나 편집에도 매우 유용하다. 텍스트 편집이라는 기본 목적에 충실하면서, 가볍고 범용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밖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다. 원한다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어쨌든 나는 텍스트 에디터를 사용한다.

그리고 텍스트 에디터계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바로 Vim과 Emacs다. 물론 그 외에도 수 많은 텍스트 에디터가 존재하고, 시대와 유행에 따라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바뀌어 왔지만, Vim과 Emacs는 수십 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둘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서, Editor War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당연한 얘기지만, Vim과 Emacs 중에서 어느 한쪽이 더 낫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둘 다 다양한 기능과 고유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정말 간단히 요약하자면 Vim은 상대적으로 기능이 적은 대신에 단순 명확하고 용량도 작은 반면, Emacs는 OS라고 불릴 정도로 기능이 많은 대신에 그만큼 복잡하고 무겁다.

나는 Vim을 선택했다. 어차피 나에게는 Vim이 가진 기능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Emacs의 어마어마한 기능들은 크게 의미가 없다. 만약 그 많은 기능들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면 Emacs가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난 아니다. 사실 나도 Emacs에 매력을 느껴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복잡함과 불편함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으며, 결국 나에게는 Vim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 앞서 Vim에 대해 설명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Emacs와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Emacs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Vim 역시 매우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꽤나 복잡하기 때문에, 결코 배우기 쉬운 에디터가 아니다. 일단 익숙해지면 큰 도움이 되지만, 그 단계까지 도달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자체적인 Tutorial, 즉 Vim Tutor를 가지고 있다. 그냥 읽기만 하는 Manual이 아니라, 직접 텍스트 편집을 실습하면서 Vim의 기능을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교재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Vim Tutor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만 다루기 때문에 일부 중요한 기능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Vim의 방대한 기능을 생각하면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물론 나와 비슷한 초보자에게는 Vim Tutor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 프로그래머나 시스템 관리자 또는 IT 업계 종사자라면 (꼭 사용은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Vim을 잘 알 것이다. 그만큼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그 밖의 분야에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좀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https://www.vim.org

# PS: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다시 Emacs에 도전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완전히 Emacs에 정착했다. (사실, 지금 이 블로그 역시 Emacs로 만든 것이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일 뿐이며, 앞서 적은 Vim과 Emacs의 장단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List2021

Post20211209

Title: "사고의 역행"
Date: 09 DEC 2021
Tags: +human +기준 @내로남불

Post20210420

Title: "벨기에 대사 부인 & 지하철"
Date: 20 APR 2021
Tags: +social +지하철 @마스크

Post20210414

Title: "A Game of Thrones: The Board Game"
Date: 14 APR 2021
Tags: +game +Android @리뷰

Post20210223

Title: "명언 제조기?"
Date: 23 FEB 2021
Tags: +human +인터뷰 @강박

Post20210119

Title: "Power Corrupts"
Date: 19 JAN 2021
Tags: +politics +권력 @부패

Post20210105

Title: "나의 수능"
Date: 05 JAN 2021
Tags: +personal +수능 @불운

Post20211209

Title: "사고의 역행"
Date: 09 DEC 2021
Tags: +human +기준 @내로남불

인간이 어떤 대상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는, 당연히 머리 속에서 사고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때 정상적인 사고의 흐름은, 먼저 현상을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삼아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와 반대의 과정을 거쳐 판단을 내린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그에 맞는 근거를 갖다 붙이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100프로 잘한 일만 있거나 100프로 못한 일만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떤 물건 또는 의견에 100프로 장점이나 100프로 단점만 존재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거의 언제나 모든 대상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혼재되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긍정이든 부정이든 미리 결론을 정해 놓으면, 그에 부합하는 근거들만 취사선택해서 하나의 완결된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그렇게 만들어진 논리는 최소한 외관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고의 과정을 역행하는 오류를 범했음에도) 자신의 착각 속에서는 자기가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상당히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고 믿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기준이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일단,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좋든 싫든 자기만의 기준을 따르게 되고, 여러 다른 대상에 대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하게 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사람이라면, 여러 사안에 대해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반면에 사고의 과정을 역행하는 사람은 임의로 미리 정해 놓은 결론에 따라 뒤늦게 논리를 만들기 때문에 기준이 그때 그때 달라진다. 결과적으로, 각각의 개별적인 논리는 말이 될지 몰라도, 범위를 확대하면 여러 대상에 대한 논리들 사이에 일관성이 없고 상충하는 일이 생긴다. 즉, 이 사안에 대해서는 원칙을 강조하더니, 저 사안에 대해서는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불명확한 기준으로 인한 논리적 결함은 반드시 내로남불로 귀결된다. 이런 현상은 특히 정치권에서 많이 나타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건 여당/ 야당/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너무나 흔히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냥 정상적인 사고의 흐름을 따르기만 하면 전혀 문제가 없을 텐데, 누군가에게는 그 단순한 일조차 어려운가 보다.

Post20210420

Title: "벨기에 대사 부인 & 지하철"
Date: 20 APR 2021
Tags: +social +지하철 @마스크

최근 주한 벨기에 대사 부인이 옷 가게 종업원을 폭행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당연히 큰 잘못이다. 그러나... 대사 부인 정도 되는 사람이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질렀을까? 주차 위반 따위의 사소한 잘못도 아니고, 자신과 남편의 삶에 큰 악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한 그런 행동을 왜 한 걸까? 전후 사정을 모르는 우리가 섣불리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내가 겪었던 일을 한가지 얘기해보겠다. 몇 달 전쯤, 한참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확산되던 당시의 일이다. 퇴근을 위해 지하철에 탔는데,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고 있거나 코를 가리지 않고 반쯤 내린 상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한 남성이 나서서 그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똑바로 착용하라고 주의를 주는 일이 생겼다. 그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다. 문제는 그 사람의 태도다. 시비를 거는 듯한 불손한 태도로 지적질을 시작했고, 그런 태도에 반감을 느껴 끝까지 마스크를 올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욕설까지 내뱉었다. 그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방법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러다가 시비가 붙고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경찰이 개입하고 뉴스에라도 나오게 되면, 과연 어떤 식으로 기사가 작성될까? 아마도,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승객이, 이를 지적하는 시민을 폭행했다"라고 나오지 않을까? 내가 직접 본 사실에 의거하여 판단하자면, 애초에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사람들도 당연히 문제지만, 그런 방식으로 지적을 했던 사람에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가 예의를 지키면서 말했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켰고, 그로 인해 싸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별 일 없이 지나갔다.) 물론, 언론 기사만 보면 그런 부분까지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마스크로 인해 발생한 시비가 심심치 않게 뉴스에 나온다. 일반적으로는, 지적을 한 쪽이 정의로운 시민이고 지적을 당했던 쪽은 범죄자처럼 묘사되는데, 지하철에서의 경험을 통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번 사건에서도 벨기에 대사 부인이 갑질을 일삼는 악녀처럼 묘사되는데, 혹시 그렇게까지 격분할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한된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Post20210414

Title: "A Game of Thrones: The Board Game"
Date: 14 APR 2021
Tags: +game +Android @리뷰

최근 <A Game of Thrones: The Board Game>이 Android로 출시됐다. 작년 10월에 PC로 먼저 출시되었고, 이번에 Android로 이식된 것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인생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최고의 게임을 찾은 것 같다. 단,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어쨌든, 왜 나에게 최고의 게임인지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해보겠다.

  1. 테마

    일단, 소설이든 영화든 게임이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테마는 "냉병기 전쟁물"이다. 게임으로 말하면, 고대 또는 중세 역사를 배경으로 한 전략 게임이 가장 내 취향에 가까운 장르다. 또한, 검과 마법이 주를 이루는 판타지 배경 전략 게임도 비슷한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현대전이나 SF 배경의 전략 게임은 (객관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명작이라 해도) 내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취향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나에게 <왕좌의 게임>은 이 분야에서 최고의 작품이다. 기본적으로는 판타지물이지만 비현실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고, 역사물처럼 현실적인 권력다툼과 전쟁을 보여주지만 어쨌든 픽션이기 때문에 좀 더 드라마틱하게 묘사되어 있다. <AGoT: TBG>은 바로 그 <왕좌의 게임>을 테마로 삼은 게임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2. 게임플레이

    게임의 테마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임플레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게임을 논할 때 게임플레이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전략 게임인데, 그에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보드 게임이다. Replay Value가 높고,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멋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AGoT: TBG>은 "전략 보드 게임"이다. 기본적으로는 Grand Strategy 게임과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는 보드 게임 특유의 카드와 토큰을 사용한다. 단, 다른 보드 게임에서 흔히 사용하는 주사위는 없기 때문에, 운을 배제하고 실력으로 승부 해야 한다.

    또한, 단순히 내 취향에만 맞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객관적으로도 충분히 검증된 명작 보드 게임이다. 이보다 좋을 수 없다.

  3. 접근성

    보드 게임은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야 플레이 가능하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많은 보드 게임이 디지털화 되고 있다.

    <AGoT: TBG>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PC로 발매되었고, 이후 모바일로 이식되었다. 처음 디지털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좋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모바일판 얘기는 없어서 내심 걱정을 했는데, 드디어 Android로 이식된 것이다. 접근성 측면에서 완벽해졌다.

요약하면, 테마/ 게임플레이/ 접근성 등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깝다. 요즘 정말 푹 빠져서 플레이 중이다. 최소 몇 년은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언젠가는 실물 보드 게임을 구입해서 지인들과 플레이 해볼 생각이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완벽한 게임이 될 것이고, 설사 조금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강력히 추천한다.

Post20210223

Title: "명언 제조기?"
Date: 23 FEB 2021
Tags: +human +인터뷰 @강박

예전에는 유명인이 인터뷰 등에서 뭔가 멋진 말들을 하면, "아 역시 대단한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도 다르구나!" 라고 감탄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인터뷰를 볼 때 오히려 불편함이 느껴진다. 뭐랄까... 뭔가 멋진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로 인터뷰에서 했던 그 멋진 말 그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왔을까? (그런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으로 그저 열심히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성공을 했고, 그렇게 유명해져서 인터뷰를 하게 되니 뭔가 멋진 명언 하나쯤 남겨야겠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Post20210119

Title: "Power Corrupts"
Date: 19 JAN 2021
Tags: +politics +권력 @부패

"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 John Dalberg-Acton

요즘 들어 정치에 대해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특정 인물 또는 특정 세력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인간은 힘을 가지면 타락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권력을 잡기 전에 가졌던 초심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다. 현재의 진보 정권도 마찬가지고, 과거의 보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진보가 정권을 유지하든 보수가 정권을 탈환하든, 이 현상은 어차피 반복될 것이고 우리가 그 동안 봐왔던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매우 뛰어난 어떤 정치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인기를 얻기 위한 가식이 아니라,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명감과 모든 면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완벽한 정치인이다. 현 정권에 실망한 많은 이들이 그가 대통령이 되면 여러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지지할 것이다. 그 정치인 역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마음으로 출마하여 당선이 된다. 그러나, 일단 권력을 잡으면 그 정치인의 모습은 변할 것이고, 이전의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 정치인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지위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차피 불완전한 존재이고, 힘을 얻었을 때 그 불완전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현재 대통령직에 있는 분이 문재인 대통령이기 때문에 내가 마치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특정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든 보수든 그 누구라도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깨트렸던 정치인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특정인 또는 특정 세력에게 힘을 몰아주지 않으면 다 해결이 되는 걸까? 말은 쉽지만, 이 또한 불가능하다. 현대 국가는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해졌다. 일원화된 지휘 체계가 없이 이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은 대표자를 뽑고 그가 국가를 이끌 수 있도록 권력을 줄 수 밖에 없다. 물론, 독재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견제 장치가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권력이 지도자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요약하면,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될 경우 반드시 문제가 생기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이 구조를 타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누가 권력을 잡든 그다지 달라질 것도 나아질 것도 없다는 뜻이다. 어차피 누가 집권하든 마찬가지라면, 특정 정치인 또는 정당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모두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Post20210105

Title: "나의 수능"
Date: 05 JAN 2021
Tags: +personal +수능 @불운

중년의 나이가 되어 새해를 맞았다. 특별한 질병이나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딱 인생의 절반쯤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 인생을 돌아보면 많은 아쉬움과 후회를 느낀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실패의 경험은 수능이다. 전혀 의미 없는 신세한탄이지만, 당시 상황을 한번 적어보고 싶다.

내가 수능에서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내 공부 스타일과 정부의 변화된 수능 난이도 정책이 상극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히 운이 없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모든 것이 "오직" 불운 때문만은 아니었고 당연히 내 잘못도 있었다. 그러나, 운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내 공부 스타일은 선택과 집중에 특화되어 있었다. 잘하는 과목은 완벽하게 준비하고, 못하는 과목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못하는 과목에서 잃은 점수는 잘하는 과목에서 만회한다. 이 스타일의 특징은, 시험의 난이도가 높든 낮든 일정한 수준의 점수가 나온다는 점이다. 잘하는 과목은 준비가 잘 되어 있으니, 시험 문제가 쉽든 어렵든 항상 높은 점수가 나온다. (쉽든 어렵든 어차피 다 아는 문제다. 결과적으로 항상 만점에 가까운 점수가 나온다. 단,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만점 이상으로 추가 점수를 주는 것은 아니니까, 시험이 쉬워도 점수가 크게 올라갈 여지가 적다.) 반대로, 못하는 과목은 준비가 잘 안되어 있으니, 시험 문제가 쉽든 어렵든 항상 낮은 점수가 나온다. (어차피 공부를 안 한 사람에게는 다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시험이 아무리 쉽거나 어려워도 찍어서 맞출 확률은 비슷하다. 물론, 내가 전혀 공부를 안 하고 다 찍었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이런 스타일을 가진 수험생 입장에서는 시험이 어려울수록 유리하다. 내 점수는 일정하지만 경쟁자들의 점수가 낮아질 테니까.

반면에,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전 과목을 두루두루 공부하는 스타일은 시험 난이도에 따라 점수 변화가 심하다. 아는 문제가 많이 나오느냐 모르는 문제가 많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일의 수험생에게는 당연히 시험이 쉬울수록 유리하다.

그리고, 98학번 수능은 정부가 급격하게 쉬운 난이도를 도입하기 시작한 첫 수능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보니, 전체 평균 점수가 전년도에 비해 무려 41.8점이나 올랐다고 한다. (예를 들어, 수능 전 모의고사에서는 300점이면 상당히 높은 점수였으나, 실제 수능에서 300점은 지극히 평범한 점수가 되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동일하게 쉬운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기계적인 공평함은 보장되었지만, 급격한 난이도 변화로 인해 수험생별로 유불리가 존재했던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이유로 인해 나에게는 극단적으로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전체 평균이 40점 가량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수치화할 수는 없겠으나) 내 점수 상승폭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결국, 전교 1등까지 해봤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던 내가, 그냥 평범한 중위권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참고로, 내 고향은 고교 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명문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한 고등학교에서 서울대에 두세 명 정도 입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할 정도면... 나는 충분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어버린 뼈아픈 실패였다. 물론, 그 이후로도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본격적으로 인생의 쓴 맛을 느껴본 첫 경험이었던 것 같다.

List2020

Post20201201

Title: "맥베스 Macbeth"
Date: 01 DEC 2020
Tags: +book +셰익스피어 @리뷰

Post20201007

Title: "오스만 제국의 꿈"
Date: 07 OCT 2020
Tags: +drama +넷플릭스 @리뷰

Post20200909

Title: "여성 전용 주차 구역"
Date: 09 SEP 2020
Tags: +social +성평등 @주차

Post20200715

Title: "보편적 기준"
Date: 15 JUL 2020
Tags: +human +기준 @아름다움

Post20200615

Title: "동성애 논란"
Date: 15 JUN 2020
Tags: +social +동성애 @차별

Post20200226

Title: "5개의 등급"
Date: 26 FEB 2020
Tags: +social +등급 @후회

Post20200224

Title: "동물농장 Animal Farm"
Date: 24 FEB 2020
Tags: +book +조지오웰 @리뷰

Post20201201

Title: "맥베스 Macbeth"
Date: 01 DEC 2020
Tags: +book +셰익스피어 @리뷰

<맥베스 Macbeth> -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어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완독했다. 워낙 유명한 희곡 작품이고 대강의 줄거리는 누구나 다 알겠지만, 정작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정보가 아니라, 내가 직접 읽어본 경험에 바탕을 두고 <맥베스>라는 명작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점이 뿌듯하게 느껴진다. 다만,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워낙 많이 알려진 작품이고, 책이든 인터넷이든 너무 쉽게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맥베스>를 읽기 전에 "고전 작품은 지루하고 따분하다"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런 편견을 버리고 읽어나가면, 마치 <왕좌의 게임>을 축약해 놓은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참고로 <맥베스>는 상당히 짧은 작품이다.) 굳이 <왕좌의 게임>과 비교하는 것은, <왕좌의 게임> 자체가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최근에 크게 성공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즉, <왕좌의 게임>이 현대인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는 것은, 그와 유사한 <맥베스> 역시 현대인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 인터넷에는 <왕좌의 게임>과 <맥베스>를 포함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비교해 놓은 글들이 꽤 많이 있다. 나 역시 <맥베스>를 읽는 동안 <왕좌의 게임>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맥베스>는 음모, 배신, 암살, 전쟁, 복수 등 현대의 소설이나 영화/드라마에서 흔히 다루는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걸작이다. 뭔가 고차원적인 분석과 비평은 내 능력 밖의 일이므로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 순수하게 재미의 관점에서만 봐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특별히 고전을 좋아하기 때문에, 또는 고전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나름 재미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고전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현대의 역사/전쟁물에만 익숙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적극 추천한다.

# PS: 마이클 패스벤더 Michael Fassbender 주연의 2015년 영화도 함께 추천한다. 당연히 내용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영상미가 매우 뛰어나다. 참고로, 미국인인 여자친구와 함께 봤는데, 자막으로 영화를 보는 한국인(나)보다 영어 원어민(여자친구)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영어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멈추고 한국인이 미국인에게 설명을 해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아무래도 대사가 현대 영어와는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어차피 자막은 현대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직접 대사를 듣고 이해해야 하는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Post20201007

Title: "오스만 제국의 꿈"
Date: 07 OCT 2020
Tags: +drama +넷플릭스 @리뷰

역사/전쟁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다. 넷플릭스에서 발견한 <오스만 제국의 꿈 Rise of Empires: Ottoman> 역시 그 범주에 들어간다. 당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 길지도 않은 시리즈여서 부담 없이 시청을 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수작이다! 덕분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 소재

    일단, 기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소재를 선택했다. 세계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고(로마의 멸망과 중세의 종식, 오스만의 부흥), 전쟁사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고(대포를 사용한 성벽 파괴), 단순하게 "영웅 서사" 측면에서만 봐도(메흐메트 2세) 충분히 재미 있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2. 구성

    독특한 구성이 몰입감을 상승시킨다. 이 시리즈는 전문가가 설명을 해주는 다큐멘터리 요소와 역사적 장면을 재연한 드라마적 장면이 뒤섞여 있는 구조다. 이것이 특별한 방식은 아니고, 오히려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사용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그런데, 다른 작품들은 통상 다큐멘터리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드라마적 장면은 이를 보조하는 선에서 삽입되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드라마 비중이 훨씬 크다. 전혀 딱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드라마 부분 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전문가의 설명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역할에 국한되지만,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드라마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도 정보의 전달 역시 놓치지 않았다.

  3. 제작

    소재가 좋아도 제작이 부실하면 소용이 없다. 다행히 이 시리즈는 정말 잘 만들어졌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드라마 부분의 퀄리티다. 비슷한 형식의 다른 작품들은 드라마 부분의 중요도가 낮고, 중요도가 낮으니까 결과적으로 그 품질 역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드라마 부분의 중요도가 훨씬 크기 때문에, 그 재연 퀄리티도 블록버스터 전쟁물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왕좌의 게임>에 필적할만한 수준이다. 기대를 뛰어넘는 영상미에 놀라게 된다.

워낙 유명하고, 중요하고, 재미있는 역사적 사건을 최고 수준의 다큐멘터리 & 드라마로 제작했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취향에 관계 없이 누구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시리즈가 아닐까 한다. 물론, 나처럼 역사와 전쟁물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더더욱 좋은 작품이다. 강력히 추천한다.

Post20200909

Title: "여성 전용 주차 구역"
Date: 09 SEP 2020
Tags: +social +성평등 @주차

차별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 것이다. 실제 잘못을 해서 불이익을 받는 건 차별이 아니다. 죄 짓고 교도소에 가는 것은 차별이 아닌 것처럼. 앞서 동성애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차별이다.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불합리는 당연히 근절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너무나 긴 시간 동안 존재해온 뿌리깊은 차별이 있으니, 그게 바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간혹, 더 이상 여성에 대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시적인 케이스 별로는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일반화할 수 있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강하게 존재한다. (그 정도에 대한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존재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가 깊은 차별이기에, 그에 대한 저항의 역사도 깊다. 이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자기 방어 행위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식의 선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일부 생긴다. 그러나, 그 어떤 조직이나 단체나 계층을 보더라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일정 비율로 반드시 섞여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일부의 문제로 인해 페미니즘 전체를 공격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쨌든, 내 생각에 대해 전반적으로 적다 보니 서설이 길어졌다. 사실 이 글을 적게 된 이유는, 여성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시작한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여성에 대한 비하가 되어버린 어떤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이다. 바로 "여성 전용 주차 구역"이다.

운전 실력은 성별과 전혀 관계가 없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전용 주차 구역이 생겨난 것은, "여성들은 운전 실력에 있어서 남성들 보다 열등한 존재다"라는 차별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주차 구역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여성 전용 주차 구역을 보고 불쾌감을 느낀다는 외국인 여성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운동 경기를 생각해보자. 여성이 남성보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별에 따라 분리하여 경기를 한다. 이 것은 생물학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차별이나 비하가 아니다. 또한, 남자부와 여자부를 나눈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피해를 보는 일도 없다. 그러나 주차는 전혀 다른 문제다. 여성 전용 주차 구역을 나눔으로써 여성들은 명백한 비하의 대상이 되고, 반대로 남성들은 주차 공간의 부족이라는 불편을 겪게 된다.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러한 부분은 여성 단체들이 나서서 없애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이런 목소리를 내면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단순히 편안함을 위해 비하의 의미가 담긴 특권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성 평등에 대한 인식을 퇴보시킬 뿐이다.

# PS: 혹시나 오해가 있을지 몰라 첨언을 하자면, 장애인이나 임산부 전용 주차 구역은 당연히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건강한 여성들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여 별도의 주차 구역을 지정하는 과잉보호에 대한 것이다.

Post20200715

Title: "보편적 기준"
Date: 15 JUL 2020
Tags: +human +기준 @아름다움

우리는 "보편적 기준"이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는 분명 보편적 기준이 중요하게 작용하며, 그와 관련해 특별히 혼동스러운 부분도 많지 않다. 그러나, 취향이나 개성에 관련된 문제에서는 이 보편적 기준이라는 말이 상당히 모호하다.

가장 쉬운 예로, 미적 기준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람들에게 김태희와 전지현 중 누가 더 예쁘냐고 물어보면, 김태희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고 전지현이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 비슷한 비율로 나눠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당연히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답변이 달라진다. 여기에서 "보편적 기준으로 봤을 때 어느 한 쪽이 더 낫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김태희와 오나미 중 누가 더 예쁘냐고 물어본다면, 절대 다수가 김태희라고 답할 것이다. (부정적인 예로 특정인을 지칭해서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본인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이용해 활동하시는 분이니까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즉, 여기에서는 분명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는 보편적 기준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상황에 따라 개인적 취향이 더 크게 작용할 수도 있고, 보편적 기준이 더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 다만, 적용 기준을 변화시키는 그 "상황"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결론도 없이 무의미해 보이는 글을 적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오묘함이랄까? 동물들은 특정 상황에서 대부분 비슷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 양식은 개인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또 뭔가 공통적인 경향도 보인다. 다양성과 보편성이 공존하는 것이다.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Post20200615

Title: "동성애 논란"
Date: 15 JUN 2020
Tags: +social +동성애 @차별

동성애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민감한 주제였고,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사안이다.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본다.

동성애자 또는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동성애 자체가 지극히 정상이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동성애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동성애를 타락과 죄악으로 규정하고 무슨 범죄자를 소탕하듯이 동성애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엔 둘 다 틀렸다.

일단, 동성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맞다. 자기들끼리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너무 당연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솔직히, 당연한 것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다;;) 문제가 있는 게 너무 명백한데,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동성애자들 자신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그 문제의 성질이 "죄악"이 아니라 "질병"에 가깝다. 우리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했을 때 "죄"라고 부른다. 그러나, 동성애는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절대다수가 이성애자인 이 세상에서, 그 길을 선택하면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이 그걸 좋아서 선택했겠나? 불가항력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본인들은 이런 표현에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 문제는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한 것과 유사하다. (아쉽게도 치료가 안 되는 병이다.) 그리고, 병에 걸린 환자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성애도 동일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동성애 자체는 개인의 자유지만 법적으로 동성 결혼을 용납할 수는 없다. 이는 동성애를 문제가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성애자를 혐오 또는 차별하는 행위도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사회적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동성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충분히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데, 양쪽의 주장이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Post20200226

Title: "5개의 등급"
Date: 26 FEB 2020
Tags: +social +등급 @후회

40대 초반이 되어서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에는 대략 5개의 등급이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분류 기준은 경제력이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 등급: 인생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진짜 부자들이다. (그들도 배부른 고민, 행복한 걱정 따위는 당연히 할 것이다. 그런 건 제외하자. 배부른 고민까지 따지기 시작하면, 이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단, 같은 등급 내에서도 얼마든지 편차는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강남의 건물주를 생각해보자. 그것만으로도 이 사람은 엄청난 부자다. 그러나, 이 사람이 아무리 부자라 해도, 대기업 오너의 재산에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인생에 아무 걱정 없는 거부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내 기준으로 보면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 2 등급: 원래부터 거부는 아니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이룸으로써 생계나 노후 따위는 걱정할 필요 없이 누릴 것 누리면서 사는 계층이다. 변호사, 의사 등의 전문직 또는 그에 준하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 3 등급: 인생에 대한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살면 생계와 노후를 적절히 대비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정규직 직장인 또는 그에 준하는 계층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등급 내에서도 당연히 편차가 있다. 대기업 직원은 이 중에 상위에 속할 것이고, 중소기업 직원은 하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가장 많은 숫자가 속한 등급이 아닐까 한다.

  • 4 등급: 간신히 현재의 생계는 유지하고 있지만, 그 이상은 준비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당장은 버티지만, 코앞의 미래 조차 예측하기 어렵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바로 삶에 지장이 생기는 계층이다. 비정규직 직장인 이나 알바생 또는 그에 준하는 사람들이다.

  • 5 등급: 당장의 생계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계층이다.

기본적으로, 1등급은 보통 사람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원래 부자로 태어났거나 (Ex: 재벌 2세), 상식을 벗어나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천재이거나 (Ex: 손흥민), 이도 저도 아니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행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Ex: 복권), 일반적인 사람이 범접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은 2등급 정도가 한계인 것 같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쉽지만 전혀 그렇게 살지 못했고, 지금은 3등급과 4등급 사이쯤에 위치해 있는 것 같다. 이제는 3등급에 안착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목표가 되어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후회만 늘어간다...

Post20200224

Title: "동물농장 Animal Farm"
Date: 24 FEB 2020
Tags: +book +조지오웰 @리뷰

<동물농장 Animal Farm> - 조지 오웰 George Orwell

벌써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나는 고전 문학을 좋아한다. 고전으로 인정받으려면, 단순히 높은 역사적 가치 또는 뛰어난 문학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즉, 고전 문학이 재미없고 따분하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애초에 재미가 없다면,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가 없다.

그리고,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역시 그런 고전 작품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대략적인 내용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정작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본 적이 있는 이 소설을 나이 40이 되어서야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너무나 예리하게 정곡을 찌르는 소설이다. 왜 고전의 반열에 올랐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동물농장>은 기본적으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에 대한 풍자 소설이다. 소설 속의 캐릭터들이 각각 실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참조: Wikipedia) 물론, 다른 대부분의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당시 소련의 정치 상황을 잘 모른다. 그냥 제정 러시아가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화됐고, 레닌의 사후에 스탈린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고, 뒤이어 가혹한 숙청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당연히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더욱 깊이 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배경 지식이 없어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소설과 비슷한 모습은 꼭 스탈린 당시의 소련이 아니더라도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어차피 부패한 지도자와 무지한 대중은 어디에나 있다. 정치 체제에 관계 없이 누군가는 지도자가 되어서 권력을 잡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것이 도를 넘어서면 문제가 생기는 건 마찬가지다. 현대의 한국인이 읽어도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다. 그러한 모습을 풍자한 명작이다.

때로는 코믹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허무함이 남는다. 진지하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가볍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좋은 의미로) 매우 독특한 소설이다.

List2010s

Post20190904

Title: "영어 교육"
Date: 04 SEP 2019
Tags: +language +영어 @교육

Post20190820

Title: "Mr. My Country"
Date: 20 AUG 2019
Tags: +politics +정치인 @위선

Post20180629

Title: "양심적 병역거부"
Date: 29 JUN 2018
Tags: +social +군대 @대체복무

Post20180609

Title: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Date: 09 JUN 2018
Tags: +book +에밀리브론테 @리뷰

Post20180501

Title: "언어와 문자"
Date: 01 MAY 2018
Tags: +language +문자 @혼동

Post20180405

Title: "배려와 견제"
Date: 05 APR 2018
Tags: +social +양보 @견제

Post20180306

Title: "Me Too?"
Date: 06 MAR 2018
Tags: +social +MeToo @성폭력

Post20180305

Title: "정치인의 공과 과"
Date: 05 MAR 2018
Tags: +politics +정치인 @평가

Post20180111

Title: "한국식 나이"
Date: 11 JAN 2018
Tags: +culture +나이 @혼동

Post20180104

Title: "보복운전"
Date: 04 JAN 2018
Tags: +social +보복운전 @강약약강

Post20180103

Title: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Date: 03 JAN 2018
Tags: +book +괴테 @리뷰

Post20171219

Title: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Date: 19 DEC 2017
Tags: +book +피츠제럴드 @리뷰

Post20170706

Title: "흡연과 언론"
Date: 06 JUL 2017
Tags: +social +담배 @언론

Post20170614

Title: "포퓰리즘 & 내로남불"
Date: 14 JUN 2017
Tags: +politics +대통령 @포퓰리즘

Post20170411

Title: "의미불명"
Date: 11 APR 2017
Tags: +language +단어 @의미

Post20170410

Title: "재벌 2세"
Date: 10 APR 2017
Tags: +social +재벌 @인성

Post20170405

Title: "차악"
Date: 05 APR 2017
Tags: +politics +선거 @차악

Post20170104

Title: "인생의 주연과 조연"
Date: 04 JAN 2017
Tags: +human +주인공 @착각

Post20150501

Title: "How?"
Date: 01 MAY 2015
Tags: +misc +방법 @무의미

Post20150420

Title: "빈부격차/ 갑을관계/ 스펙차별"
Date: 20 APR 2015
Tags: +social +양극화 @포퓰리즘

Post20140515

Title: "삼위일체"
Date: 15 MAY 2014
Tags: +religion +기독교 @의문

Post20130318

Title: "무기와 인간 Arms and the Man"
Date: 18 MAR 2013
Tags: +book +버나드쇼 @리뷰

Post20190904

Title: "영어 교육"
Date: 04 SEP 2019
Tags: +language +영어 @교육

영어 교육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우선, 나에 대해 설명을 해야겠다. 난 중학교 때 영어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 영어 교육이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항상 영어였고, 실제로 영어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이었다. 자연스럽게 대학교 전공도 영어영문학을 선택했고, "영문학" 관련 과목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영어학" 관련 과목의 성적은 항상 좋았다. 취업을 앞둔 시점에는 가장 일반적인 영어 시험인 TOEIC에서 만점에 10점 모자라는 점수를 맞을 정도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직장에서도 해외영업 & 무역 일을 하게 됐으며, (회사는 중간에 한번 옮겼지만) 아직까지 같은 종류의 일을 하고 있다. 현재 여자친구는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인이고, 데이트 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결론적으로, 비록 외국에서 살거나 공부를 할 기회는 전혀 없었지만, 순수하게 한국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서는 가장 상위 그룹에 속하는 영어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굳이 이런 자랑 비슷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이후에 적을 내 의견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먼저 우리 나라의 영어 교육 방식을 생각해보자. 과거에는 "성문" 시리즈로 대표되는 문법 위주의 교육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 방식은, 일반적인 한국인이 (당시 기준으로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0년 이상 영어 공부를 하고도 영어로 (읽기는 어느 정도 하지만)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현상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구식 교육 방식으로 치부되었다. 이후에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도 영어가 포함되었고, 현 시점에 와서는 가능한 한 어린 나이부터 회화를 위주로 교육하는 방식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에 따라 원어민 교사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외국인에게 직접 지도를 받는 것이 그다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됐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교육 방식의 변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1. 일단 목표가 잘못됐다. 앞서 언급했지만, 과거의 영어 교육 방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한국인은 학교에서 그 오랜 세월 영어 공부를 했음에도, 정작 외국인을 만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이는 영어 교육 방법이 잘못 됐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어차피 외국어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업무적으로 출장이 잦은 편인데, 선진국이 많은 유럽에도 영어로 대화가 어려운 사람들이 절대 다수이며 아시아나 남미 같은 지역은 정도가 더 심하다. 평균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록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지는 못하지만, 쉬운 단어만 천천히 나열하면 대강은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결코 다른 나라에 비해 영어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독일처럼 언어학적으로 영어와 가까운 언어를 쓰는 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영어를 쉽게 배우고 전반적인 수준도 높다. 그러나, 이건 교육 방식의 문제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애초에 외국어인 영어를 한국 사람들이 유창하게 구사하기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목표 설정이다. 현실적인 수준의 목표를 설정한다면, 한국인의 일반적인 영어 수준이 낮다고 보기 어렵고, 바꿔 말해 과거의 영어 교육 방식이 잘못됐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잃는다.

  2. 또한, 영어 교육에 대해 논할 때 현실성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교육 방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언어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이다. 미국 유치원생을 보라. 특별히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십수년 공부한 한국 사람 보다 영어를 더 잘하지 않나? 한국 학생들도 그런 식으로 가르쳐야 한다." 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물론 맞는 얘기다. 그게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실성" 측면에서는 어려운 얘기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영어에 익숙해지려면 지속적으로 영어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최소 몇 년 정도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거주하는 것이다.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국내에서 영어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 또한 결코 쉽지 않다. 비용도 엄청나겠지만, 설사 그 큰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해도 완벽한 영어 환경을 만들어주기는 어렵다. (실제 그렇게 한다면 분명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는 매우 의문스럽다.) 어느 쪽이든 평범한 서민은 꿈도 꿀 수 없는 방법이다.

  3. 원어민 교사에 대한 환상도 문제다. 물론, 원어민이라고 해서 아무나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비교적 수월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름 까다로운 자격 기준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교사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얼마나 잘 가르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한국 학생들은 "외국어"로서 영어를 배우는데, 그들은 "모국어"로서 영어를 습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분명 외국어로서의 영어 교육에 대해 공부하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라지만, 공부만 했을 뿐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가르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학생들과 비슷한 과정을 이미 경험한 한국인 영어 교사가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원어민 교사가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 실력을 갖춘 상태라면 당연히 원어민 교사의 교육을 통해 어색한 부분을 다듬고 실력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정 수준 이상이 되기도 전에 무작정 원어민으로부터 교육을 받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여러 문제점들을 언급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매우 단순하다. 과거의 문법 위주의 교육 방식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매우 적절한 방법이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로 공부하는 입장이라면 문법을 통해 배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너무 당연한 부분이라 언급은 안했지만, 영어 단어를 많이 암기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즉, 문법과 단어를 충분히 가르치는 것이 영어 교육의 뼈대가 되어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독해나 회화 같은 부수적인 교육을 병행하는 것이 효율성과 현실성을 모두 고려했을 때 가장 바람직한 교육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원어민 교사의 교육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여기까지 읽은 분이 있다면, 너무나 구태의연한 결론에 실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의 방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까지 적은 내용은 교육학에 대한 지식이나 통계적인 근거 없이 내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또한, 어디까지나 거시적인 영어 교육 방식에 대한 의견이다. (각각의 개인에게 맞는 세부적인 영어 교육 방식은 그 사람의 능력이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블로그에 적는 짤막한 글에서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어쨌든, 전형적인 "구식 영어 교육"을 통해 나름 괜찮은 결과를 얻은 사람 입장에서 그 동안 생각해온 바를 적었다. 영어 공부의 방향을 잡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Post20190820

Title: "Mr. My Country"
Date: 20 AUG 2019
Tags: +politics +정치인 @위선

요즘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의혹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의혹일 뿐, 아직까지 법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난 바는 전혀 없다. (상세한 내용은 여러 기사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얘기하고 싶다.)

난 법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이후로도 직접적인 위법 행위가 밝혀질 리는 없다고 확신한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설사 뭔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법을 어기면서 까지 무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도록 최대한 법망을 피하되, 도저히 피할 수 없다면 포기했을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얻는 것 보다 잃을 것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즉, 조국이라는 사람이 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일반적인 상식과 법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지하철에서 마침 빈 자리를 발견하여 편하게 앉아있는데, 나이 많은 할머니가 그 앞에 서 계시다고 생각해보자. 법적으로는 양보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 자리는 먼저 앉은 사람의 정당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면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다. 특히나 그 사람이 평소에 노인 공경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주장해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비난 받을 수 밖에 없다. 지금 조국 후보자의 모습이 정확히 이와 같다.

조국 후보자는 이후의 청문회를 통해 본인이 "범법자"가 아니라는 점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위선자"라는 점은 숨길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법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니까.

Post20180629

Title: "양심적 병역거부"
Date: 29 JUN 2018
Tags: +social +군대 @대체복무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나,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뉴스나 신문 기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처럼 단순하고 쉬운 문제가 왜 논란이 되는지 모르겠다.

일단,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주장은 "힘든 군생활을 회피하기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훈련을 받는 것은 나의 종교적 또는 개인적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국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렇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전과자가 됐다. 사실, 그들의 주장은 일견 이해가 간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신념이 다를 수 있는데, 그로 인해 교도소 까지 가야 한다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병역을 거부했으니 어느 정도의 불이익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전과자로 만드는 건 좀 심하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를 수용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군대에 가기 싫어서 고의로 허리 디스크를 유발하고, 스스로 살을 찌워 고도비만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 손가락까지 자르는 세상이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군대가 열악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수용하면, 단순 병역기피자들이 스스로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주장할 것이 자명하다. 이는 독심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밝혀낼 방법이 없다. (물론, 그 동안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모두 군대에 가기 싫어 거짓말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신념에 동의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 신념을 위해 전과자가 되는 것까지 감수할 정도라면, 그 신념은 진심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마치 어려운 문제인 것처럼 적었지만, 사실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체 복무제도를 만들되, 군생활 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더 힘든 일을 하도록 하면 된다. 앞서 말했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군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기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하면, 대체복무가 육체적으로 더 힘든 일이라도 거부해선 안된다. 이렇게 하면, "가짜"들은 차라리 군대를 선택할 것이고, "진짜"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전과자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으며, 국가는 기피업종에 동원할 수 있는 값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어 좋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면, 대체복무자에게 어떤 일을 시켜야 할까? 장애인 돌봄 따위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지만)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수하면서, 밤낮으로 육체 노동과 군사훈련에 시달리고, 여러 화기를 다루는 과정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하는 군생활을 어떻게 장애인 돌봄과 비교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은, 국가가 진행하는 여러 공사 현장에 그들을 투입하는 것이다. 그런 일자리야 차고 넘쳐날 테고, (일반적인 일용직 노동자 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줘도 될 테니까) 비용절감에도 도움이 되며, 그 정도 강도와 위험은 있어야 군대에 가는 사람과의 형평성도 맞다.

어쨌든, 이처럼 쉽고 단순한 문제가 왜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이제야 논란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Post20180609

Title: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Date: 09 JUN 2018
Tags: +book +에밀리브론테 @리뷰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 Emily Bronte

에밀리 브론테 Emily Bronte가 쓴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을 드디어 다 읽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히스클리프의 처절하고 비극적인 사랑과 복수는, 제목 그대로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 방식은 매우 유머러스하다는 점이다. 이는 작중 "명목상의 화자"인 록우드와 "실질적인 화자"인 엘렌 딘의 말투 때문인데, 상당히 이질적이고 역설적인 느낌을 준다.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다. 신선한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았다.)

워낙 유명하고 명작으로 인정받는 소설이기 때문에, 굳이 뛰어난 점을 논하기 보다는 아쉬웠던 점을 위주로 얘기해보고 싶다.

먼저, 전반적인 내용 전개 중 가장 허술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가출했다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 돌아온 경위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힌들리 언쇼가 히스클리프에게 대저택과 모든 땅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도박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정도 규모의 담보를 제공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매우 큰 돈을 빌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히스클리프가 그런 엄청난 재산을 어떻게 모았을까? 우리 현실을 생각해보면, 든든한 배경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고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부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초 영국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폭풍의 언덕>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 내에서 큰 의미가 없는 내용이라면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생략할 수 있다. 문제는, 히스클리프의 재산은 이후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이처럼 중요하다면, 당연히 그럴듯한 설명이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개츠비의 막대한 재산은 소설 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지만, 그가 빈손으로 시작해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된 경위가 너무 단순하게 설명되어 있다.)

두 번째로, 히스클리프가 선택한 증오의 대상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자신을 학대한 힌들리 언쇼나 연적이었던 에드거 린턴을 증오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벨라 린턴 (에드거 린턴의 동생이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다), 캐서린 린턴 (에드거 린턴의 딸이지만,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캐서린 언쇼의 딸이기도 하다), 린턴 히스클리프 (린턴가의 핏줄이지만, 자기 친아들이다!) 까지 증오하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린턴 히스클리프는 친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미워했고,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치료조차 해주지 않고 방치했다.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소설의 "시점"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굳이 나누자면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그러나, "1인칭 관찰자"에 해당하는 록우드가 실질적인 화자가 아니라, 엘렌 딘이라는 또 다른 인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형식이다. (심지어는 엘렌 딘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시 록우드가 전해 듣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즉, 소설 속의 모든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때 엘렌 딘(또는 엘렌 딘에게 이야기를 전해줄 또 다른 인물)이 항상 그 자리에 함께 동석해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엘렌 딘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등장인물들이 거리낌 없이 매우 은밀하고 개인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장면이 다수 존재한다. (엘렌 딘이 그러한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록우드에게 설명해줄 수 도 없고, 그러면 소설 자체가 진행되지 못할 테니까...) 소설이 꼭 현실적인 필요는 없으나, 그러한 점을 감안해도 너무 부자연스럽다. 작중 실질적인 화자인 엘렌 딘은 사실상 소설 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1인칭이지만 소설 내용은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느껴진다. 애초에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소설을 썼다면 이런 부자연스러움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이런 방식을 사용했을까?

마지막으로, 문제점이라기 보다는,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졌으나 나중에 이해하게 된 부분을 한가지 언급하고 싶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 속의 중요 등장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요절한다. 프랜시스 언쇼, 캐서린 언쇼, 힌들리 언쇼, 이사벨라 린턴, 에드거 린턴, 린턴 히스클리프... 그리고 주인공인 히스클리프 자신까지! 모두 제 명을 채우지 못한다. 당연히 등장인물이 죽을 수도 있는 거지만, 좀 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의 삶에 대해 읽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에밀리 브론테의 실제 삶에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다. 1818년에 태어난 에밀리 브론테는, 1821년 어머니의 죽음, 1825년 두 언니의 죽음, 1842년 어머니를 대신에 가족을 돌보던 이모의 죽음, 1848년 오빠의 죽음을 경험했다. 본인 자신도 1848년에 죽었고, (본인이 볼 수는 없었겠지만) 여동생 또한 1849년에 죽었다. 이처럼 많은 죽음을 경험했으니, 소설 역시 그러한 삶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소설은 정말 뛰어난 소설이다. 격정적이고 흥미진진한 내용 속에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은 점이 정말 마음에 든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다. 아쉬운 점을 위주로 얘기한 것은 워낙 장점이 많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Post20180501

Title: "언어와 문자"
Date: 01 MAY 2018
Tags: +language +문자 @혼동

많은 사람들이 "언어"와 "문자"의 개념을 혼동한다. 그래서 한국어를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1. 아이 엠 어 보이.
  2. NANEUN SONYEONIDA.

1번은 분명 한글로 적었지만, 한국어가 아니다. 영어라는 "언어"를 한글이라는 "문자"로 표현했을 뿐이다. 2번은 그 반대다. 알파벳을 사용했지만, 본질적으로 한국어 문장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언어와 문자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세종대왕이 만든 것은 한글이라는 "문자"일 뿐, 한국어라는 "언어"는 훨씬 오래 전부터 한민족이 사용해왔다. 한국어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언어를 적을 문자가 없어서 오랫동안 한자를 사용하다가, 세종대왕 이후로 한글이라는 새로운 문자가 생겨난 것뿐이다.

매우 단순한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듯 하여 몇 자 적어본다.

Post20180405

Title: "배려와 견제"
Date: 05 APR 2018
Tags: +social +양보 @견제

예전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사회적 수준(도저히 적절한 용어가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표현했다. 문화 수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시민 의식이라고 말해도 얼추 맞을 것 같다. 어쨌든, 사회 전반적인 의식 수준에 대해 말하고 싶다.)이 많이 향상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은, 소위 말하는 "후진국"들에 비하면, 분명 잘 정돈되고 질서가 잡힌 모습이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들에 비하면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선진국 시민들은 "내가 남에게 방해가 되거나 피해를 주는 일"을 극도로 싫어한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남이 나에게 방해가 되거나 피해를 주는 일"을 용납하지 못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처럼 정 반대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결과물은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이다. 즉, 선진국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인해 질서가 잡히지만, 한국에서는 서로에 대한 견제와 그로 인한 균형을 통해 질서가 잡히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서 운전을 할 때, 여타 선진국에서는 "저 차 운전자도 나름 바쁜 일이 있을 텐데, 비교적 시간이 많은 내가 양보를 해야겠구나"라는 느낌이라면, 우리 나라는 "맘 같아서는 다 제끼고 내가 먼저 가고 싶지만, 어차피 저 차 운전자도 똑같은 생각일 테고, 서로 먼저 가려다가 사고라도 나면 골치 아프니 속 편하게 양보를 해야겠구나" 정도의 느낌이랄까... 결과적으로, 서로 양보를 하고 질서가 지켜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한국의 경우 한가지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의 균형과 질서는 "배려"가 아니라 "견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상대방을 충분히 견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 균형과 질서가 쉽게 깨져버리고 서로 추한 모습을 노출시키게 된다. (흔히 발생하는 "갑질" 사건들이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잠재적인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물론, 선진국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성인군자인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라고 해서 모두가 소인배인 것은 아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는, 내가 느낀 바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비슷하긴 하지만,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기 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Post20180306

Title: "Me Too?"
Date: 06 MAR 2018
Tags: +social +MeToo @성폭력

최근 #MeToo 운동이 화제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가해자의 범죄를 고발하고, 그 가해자가 비난 또는 처벌을 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예전에, 아직 우리나라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시절에는,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을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흔히 있었다. 이제 피해자가 당당히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 전체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러나, 최근의 흐름을 보면 우려스러운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MeToo 운동은 기본적으로 가해자를 사법기관에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여론에 대한 폭로와 호소일 뿐이다. 즉,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법적인 조사 절차 없이 공개적인 폭로만을 통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구조다. 자기방어의 여지 따위는 없다. 물론, 매장당해 마땅한 나쁜놈들도 정말 많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무고 당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다수의 나쁜놈들을 벌하기 위해 소수의 억울한 사람을 모른 척 해도 되는 걸까?

또한, 성폭력을 당했다는 일방적인 주장에 대해 검증할 방법이 없다. 설사 물리적인 강제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피해 여성이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에 굴복해서" 어쩔 수 없이 응했다면 이는 분명 성폭력이다. 그러나,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응한 경우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 일이 발생한 직후에는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시류에 편승하여 폭로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의심스럽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여성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당연히 이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를 명확히 구분할 방법이 있을까?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성을 이용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상대 남성을 무고하려는 여성"이 공개적으로 거짓 폭로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MeToo 운동은 이를 걸러낼 방법이 없다. 나중에 법적 공방을 통해 남성의 결백함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이미 공개적인 거짓 폭로로 인해 그 남성에게 가해진 피해는 복구할 방법이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최근 #MeToo 운동을 통해 폭로된 여러 사건들 중 진실인 경우가 거짓인 경우 보다 압도적으로 많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억울하게 무고를 당한 남성이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설사 지금까지는 다행히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 앞으로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MeToo 운동은 "절대선"이 아니다. 이를 걸러낼 방법이 없다면, #MeToo 운동은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성폭력은 당연히 근절되어야 할 범죄 행위이고,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하며, 가해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 하더라도, 정당한 방법을 통하지 않는다면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It is better that ten guilty persons escape than that one innocent suffer"

- William Blackstone

누구나 알고, 모두가 공감하지만, 유독 #MeToo 운동에는 적용되지 않는 원칙이다.

Post20180305

Title: "정치인의 공과 과"
Date: 05 MAR 2018
Tags: +politics +정치인 @평가

여러 유명 정치인(특히 과거의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 또한 정치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이라는 "공"이 있는 반면에, 독재와 탄압(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고문과 살인)이라는 "과"가 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의 업적이 그의 과오를 덮고도 남는다고 주장한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반대 주장을 한다.

그런데, 한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공"과 "과"는 서로 상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A라는 사람이 선행을 베풀어 누군가의 목숨을 구했는데, 동일 인물 A가 시간이 흐른 후에 살인을 저질러 또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해보자. 앞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했으니, 한 명쯤 죽여도 죄를 묻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반대로, 한 사람을 죽였으니 앞서 베풀었던 선행은 없어져 버리는 것일까? 아니다. 선행은 선행이고 죄는 죄다. 선행과 악행이 서로 상쇄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박정희로 돌아오면, 그의 업적과 죄악은 공존한다. "공이 더 크니 전체적으로 봐서 좋은 사람이다" 또는 "과가 더 크니 전체적으로 나쁜 사람이다" 따위의 판단은 맞지 않다. 박정희를 예로 들었으나,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인을 무조건 이분법적으로 평가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덮어버릴 수 없다. 이 당연한 사실을 왜 간과하는 걸까?

Post20180111

Title: "한국식 나이"
Date: 11 JAN 2018
Tags: +culture +나이 @혼동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한국은 독특한 나이 계산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은 "만 나이"를 사용하고, 한국에서조차 공식 문서 등에는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지만,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나이는 항상 그보다 1~2살 가량 많게 계산한다. (생일이 지났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즉, 한국의 나이는 "올해가 그 사람이 태어나서 몇 번째 맞는 해인가?"를 의미하고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는, 태어난 바로 다음날 2살이 된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사람이 태어난 지 몇 년이 되었는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세계에서 이런 나이 계산 방식을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물론, 내가 전문적인 조사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과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는 나라가 또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방식을 쓰는 나라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왜 우리만 이런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는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 탓이 아닌가 한다. 요즘 들어 그런 경향이 많이 줄어든 것은 맞지만, 여전히 한국 문화에서는 위계질서가 매우 중요하다. (심지어 한국어에서는 그러한 위계질서에 따라 사용하는 말까지 달라진다.) 그리고 그 위계질서를 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바로 나이다. 물론, 회사에서는 직급이 중요하고, 군대에서는 계급이 중요하고, 거래 관계에서는 누가 "갑"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2차적인 조건이 없을 경우 (쉽게 말해, 업무적/개인적으로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경우) 위계질서를 정하는 것은 결국 나이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만 나이"를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만 나이"를 사용한다는 것은, 바꿔 말해 각각의 개인이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시점이 모두 달라진다는 의미다. 어제는 동갑이었던 사람이, 오늘 생일이 지나고, 내일은 형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어제는 동생이었던 사람이 내일은 동갑이 될 수도 있다. 즉, 안정적인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시기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는,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한국인에게 여간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 아니다. 반면에, 현재의 한국식 나이 계산법을 사용하면 모든 사람이 새해 첫날 동시에 나이를 먹는다.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도 한번 정해지면 평생 변하지 않는다. 반말을 썼다가 존댓말을 썼다가 헷갈릴 이유도 없다. 한국 문화 기준으로는 정말 편리한 방식이다.

어떤 방식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다. 그리고, 최소한 한국에서는 한국식 나이가 더 편할 수 있다. 그러나, 글로벌화된 현대 사회에서 한국만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외국인과 대화하다가 나도 모르게 한국식 나이를 말해버려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뭔가 중요한 문서 작성 중 나이를 적을 때 실수가 발생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나이를 2가지로 계산해야 하는데,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한국인들도 그런 불편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이를 물어볼 때 흔히 "몇 살인가?"를 묻지 않고 "몇 년생인가?"를 묻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불편함을 굳이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이제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만 나이"를 사용하도록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 예전에 보행 방향이 "좌측보행"에서 "우측보행"으로 변경되었을 당시, 초기에는 다소 혼동스러웠지만 이제 전혀 불편하지 않다. 나이 계산 방식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개인이나 민간 단체가 나라 전체를 바꾸기는 어려울 테니, 정부 주도로 뭔가 캠페인이라도 실시했으면 좋겠다.

Post20180104

Title: "보복운전"
Date: 04 JAN 2018
Tags: +social +보복운전 @강약약강

얼마 전 버스 기사와의 사소한 시비로 인해, (좀 거창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일단,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내가 운전 중이었고, 한 버스가 매우 위험하게 끼어들었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차들이 없었기 때문에, 급히 차선을 바꿔 피할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화가 났고 매우 길게 경적을 울렸다. 버스도 이에 질세라 같이 경적을 울렸다. 사실, 거기까지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화가 났다. 잘못을 저지른 쪽이 오히려 경적을 울려대니, 화가 많이 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화를 참지 못하고, 버스 앞에 잠깐 차를 세워서 버스의 주행을 방해했다. 부끄럽지만 전형적인 보복운전을 한 것이다. (단, 정말 솔직히 말하는데, 위험을 느낄 정도의 급정거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앞쪽 신호등에 정차를 하게 됐는데, 역시 함께 정차한 버스 기사가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서로 (욕설까지는 아니지만) 고함을 치며 말다툼을 했고, 신호가 바뀌자 버스 기사는 가버렸다.

그런데, 당시 버스 기사의 표정이 약간 신경 쓰였다. 뭔가 "두고 보자" 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훨씬 젊은 내가 반말로 소리를 쳤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복운전은 단순 법규 위반과는 달리 형사처벌이 가능한 범죄다. 그리고 버스에는 당연히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버스 기사가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지우고, 내 보복운전 부분만 편집하여 경찰에 신고한다면, 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조금만 참을걸 괜한 짓을 했구나... 등등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일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맴도는 과정에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크게 화를 내고 경적을 울리고 보복운전을 한 것이, 단순히 버스 기사의 위험한 끼어들기 때문이었을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묻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단순히 운전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면, 상대가 비싼 외제차라고 해도 내가 화를 내는 정도는 똑같아야 한다. 그러나, 솔직히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비싼 외제차를 몰 정도라면, 돈이든 지위든 상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일 가능성이 크고, 경우에 따라서는 운전자가 조폭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히 내 행동은 훨씬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즉, 내가 화를 내고 보복운전을 한 진짜 이유는, "운전"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버스기사에 대한 "무시"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버스 기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돈 많고 빽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버스 기사는 대부분의 경우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의 아저씨들이다. 설사, 상황이 악화되어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180cm/95kg에 달하는 30대 후반(당시 기준)의 건장한 남자인 내가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요약하면, 상대방(버스 기사)이 먼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상대방이 돈 없고 배경 없고 육체적으로도 나보다 열등하다는 판단이 깔려있었기 때문에, 내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던 것이다. "강자 앞에 약해지고, 약자 앞에 강해지는" 너무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굳게 다짐했다. "강자 앞에서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약자 앞에서 강한 척 하지 말자"라고. 사실 강자 앞에서 약해지는 것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행동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민망한 행동일 수는 있겠으나, 절대로 비난 받을만한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약자 앞에서 강해지는 것은 분명 스스로의 선택이며, 얼마든지 그러지 않을 수 있음에도 스스로를 추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짓을 했다. 너무 부끄럽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말 노력할 생각이다.

Post20180103

Title: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Date: 03 JAN 2018
Tags: +book +괴테 @리뷰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위대한 개츠비>에 이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다 읽었다. 단순히 연이어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 소설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비교를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단, 공통점은 이렇다.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이 유부녀(개츠비: 데이지 / 베르테르: 로테)를 사랑하고, 그 유부녀는 안정적인 현실(개츠비: 톰 뷰캐넌 / 베르테르: 알베르트)과 주인공의 사랑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고통 받던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면서(개츠비: 타살 / 베르테르: 자살) 소설이 마무리된다. 또한, 그러한 과정을 제 3자의 눈(개츠비: 닉 캐러웨이 / 베르테르: 빌헬름)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당연히 세부적인 내용은 매우 다르지만, 이정도 공통점은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전혀 근거 없이 추측을 해보자면,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인 F. 스콧 피츠제럴드가 활동하던 시기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미 매우 유명한 소설이었고, F. 스콧 피츠제럴드 정도 되는 작가가 그런 유명한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을 리 없으니, 아마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물론, 두 소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도 존재한다. 개츠비의 인생을 보면 (실패한 사랑을 제외하고) 도저히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맨손으로 엄청난 부를 이루고, 그 부를 바탕으로 사랑을 되찾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그 화려한 계획을 실행함에 있어 빈틈이 없었다. 물론, 나중에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건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불완전함일 뿐이다. 그 불완전함을 고려해도, 여전히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다르다. 베르테르는 보통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 있어도, 그저 바라보고 주위를 맴도는 것 외에 그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로테를 잊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직장을 구하기도 했고, 결국 잊지 못해 다시 로테 곁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와서도 달라진 것 없이 그냥 혼자 짝사랑을 이어갈 뿐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다.

솔직히, 소설적 재미를 따지자면 <위대한 개츠비>가 훨씬 재미있다. 화려하고, 흥미진진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답답하고 지루한 주인공의 신세 한탄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숨겨진 비밀이나 극적인 반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감정 이입"이 아닐까 한다. 나를 포함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다. 굳이 현대의 한국에 비교하자면,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사랑 놀음이라고 볼 수 있는 <위대한 개츠비> 보다, 그냥 일반 직장인의 삶 가운데 사랑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더 공감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대한 개츠비>는 전혀 감정 이입이 안되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따분하고 재미 없는 소설이라는 뜻이 아니다. 당연히 <위대한 개츠비>도 눈물이 날 정도로 공감 되는 부분이 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는 재미가 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위대한 개츠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아름다운 표현들은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다. 소설의 내용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표현을 음미하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간혹, 너무 과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소설 자체가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서간체 작품이기 때문에, 조금 과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다.

Post20171219

Title: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Date: 19 DEC 2017
Tags: +book +피츠제럴드 @리뷰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 F. 스콧 피츠제럴드 F. Scott Fitzgerald

드디어 <위대한 개츠비>를 다 읽었다. 마음의 위안이 얻고 싶어서, 그리고 출장 중 비행기 안에서 시간도 때울 겸 읽기 시작했는데,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멋진 작품이었다. 전문적인 문학 비평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당연히 없고, 그냥 느낀 바를 몇 자 적어보겠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점은, 이 소설이 거의 100년이나 된 고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이 충분히 공감할 만 하다는 점이다.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있는 인간 군상들, 그 와중에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주인공,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의외의 결과를 불러오는 반전 등등...

어찌 보면,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막장드라마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이런 드라마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여자가, 돈 때문에 사랑 없는 결혼을 했는데, 예전에 사랑했지만 가난해서 헤어졌던 남자가, 피나는 노력 끝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자기 과거를 숨긴 채 다시 그녀에게 접근하고, 당연히 이런 저런 갈등이 생겨나는데, 결국에는 그 여자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슬프게 최후를 맞이한다." 상당히 익숙하지 않은가? 이게 바로 <위대한 개츠비>의 내용이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분명 막장드라마와는 차이가 있다. 우선, 인물들이 상당히 입체적이다. 개츠비는 분명 주인공이지만, 불법적인 일로 돈을 번 인물이다. 그리고 자기 사랑을 합리화하려고 하지만, 어쨌든 남의 아내를 탐하는 불륜남이다. 데이지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자지만, 결국 돈을 선택하는 속물이며, 책임감이나 지적 능력도 좀 떨어진다. (딸이 되기를 바랬던 "예쁘고 머리 나쁜 여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톰 뷰캐넌은, 전반적으로 악역처럼 보이지만, 머틀이 죽었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의 순수함 역시 가지고 있다. 즉, 악역은 한없이 나쁜놈이고, 주인공은 한없이 착한 평면적 인물만 넘쳐나는 막장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르다.

또한, <위대한 개츠비>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인물의 심리나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된 아름다운 표현들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으면서, 어딘가에 적힌 줄거리 요약 정도만 읽고 작품 전체를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다른 대부분의 고전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요약한 내용만 보면 당연히 각각의 문장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표현을 절대 느낄 수 없다. 아마도 "막장드라마 비슷한 내용의 치정극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거지?" 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직접 읽어보면, 그리고 최소한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면, 한 문장 한 문장 감탄하며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너무 재미있고, 아름답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소설을 읽자 마자 바로 영화판을 봤는데, 역시 원작의 감동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랑의 숭고함과 덧없음을, 아름다운 표현을 통해 흠뻑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Post20170706

Title: "흡연과 언론"
Date: 06 JUL 2017
Tags: +social +담배 @언론

가끔 신문 또는 인터넷 기사에서 흡연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언급하는 기사들을 보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참고로, 나는 비흡연자다.)

대부분의 기사는 이런 식이다:

"흡연이 폐암 발생 위험을 X배 증가시키는 것으로 밝혀져..."

특이한 점은, 폐암 발생 위험의 증가를 상대적으로 설명할 뿐, 실제로 몇%에서 몇%로 증가하는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는 기사는 거의 없다. (사실,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내가 세상의 모든 기사를 전부 확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거의" 없다고 표현하겠다.)

왜 그럴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흡연자든 비흡연자든 폐암 발생 가능성(%)이 너무 낮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를 들어, 비흡연자의 폐암 발생 위험이 0.1%라고 하자. (당연히 임의로 예를 든 것이다. 실제 수치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흡연이 폐암 발생 위험을 10배 높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봤자, 흡연자의 폐암 발생 위험은 1%에 불과하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흡연을 하면 폐암 발생 위험이 10배로 높아져서 1%가 된다." 라고 기사를 작성하면... 아마 많은 흡연자들이 "생각보다 별로 높지 않네. 그냥 피우자."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쩌면, 흡연의 위험성이 생각보다 작다고 생각해서 새로이 흡연을 시작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즉,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위와 같은 방식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금연을 권장하기 위한 "계도"의 목적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흡연은 나쁜 것이고 금연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언론이 정확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숨기면서까지 그러한 계도 행위를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Post20170614

Title: "포퓰리즘 & 내로남불"
Date: 14 JUN 2017
Tags: +politics +대통령 @포퓰리즘

지난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보수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고 당연히 5월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예상대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다. 비록 대선 당시에는 내가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와 관계 없이 문재인 대통령이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문재인이라는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의 성공은 곧 대한민국의 성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문재인 정부의 모습을 보면, 우려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다. 비록 한달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동안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문제점은 "포퓰리즘"과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1. 내가 생각하는 포퓰리즘의 정의는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선택지와 실제 국가에 도움이 되는 선택지가 상충할 때, 국익 보다는 인기를 선택하는 정치 행태"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철저하게 인기를 우선시 하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우려된다. 대표적인 것이 위안부 합의 번복 논란이다. 일본이 저지른 잘못은 너무나 명백하고, 나 역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에 대한 사과나 보상을 더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국제적인 외교 관계를 오로지 우리 의사대로만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일본은 일본의 입장이 있고, 비록 자신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수많은 강대국들 틈에 끼어 있는 약소국에 불과하다. 아쉽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그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것이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다. 국익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 개선 및 협력 확대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내린 "모든"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이 위안부 합의가 대중의 인기에 반하는 사안이라는 점이다. 대중들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이다. (대중들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대중들에 속한 한 사람이다. 그저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성을 접어두고 오직 감성적으로만 보면, "국익을 위한 적절한 타협"은 그저 "민족의 자존심을 포기한 굴욕적인 합의"로 보일 뿐이다. 대중들의 귀에는 "(상대국인 일본과의 미래 관계나 국제적인 합의에 대한 이행 의무 따위는 모르겠고)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더 확실한 사과와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이 듣기에 더 좋을 수 밖에 없다. 당연히 국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이에 영합하고 있다. 위안부 합의 번복 논란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북한과의 관계 설정이나 비정규직 문제 등과 관련해서도 문재인 정부는 철저히 "대중적 인기"를 우선시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물론, 국익과 인기가 항상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국익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얼마든지 감성적인 이미지 정치를 통해 인기를 추구해도 상관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국익과 인기가 상충하는 상황에서는, 과감히 국익을 선택할 수 있는 지도자의 용기가 필요하다.

  2.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를 보면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 행태에 실소를 금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현재의 여당인 민주당은 야당이었던 시절에 매 인사청문회 마다 온갖 (대부분의 경우 검증되지 않은) 의혹을 폭로하며 후보자를 공격했고, 사소한 흠결이라도 발견되면 이를 트집 잡아 그 후보자를 낙마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었다. 물론, 정말로 부적절한 인물이 후보자로 지명된 경우에는 이를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고위 공직자 인사 5대 원칙"을 내세우며 자신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 진영이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 후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진보 진영이 비교적 도덕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보수 진영에 비해 비리를 저지를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라는 내 생각이 역시나 맞아떨어진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들 중에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 제시한 5대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전무하다는 점은 정말 한편의 블랙코미디다.

    개인적으로는, 사소한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능력이 출중하다면 충분히 등용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들과 관련된 의혹 및 흠결들이 그들을 낙마시킬 만큼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핑계로 사과와 반성 없이 어물쩍 임명을 강행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태도다. 과거 동일한 문제가 있던 후보자들을 수없이 공격했고, 낙마시켰고, (결국은 착각이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인사 5대 원칙을 내걸었던 당사자가 바로 문재인 대통령과 현 집권 여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지명한 후보자들에게서 이처럼 많은 문제가 발견됐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지키지도 못할 5대 원칙을 폐기하고 자신들의 오판에 대해 사과하고 야당과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5대 원칙을 고수하고 그 원칙에 따라 문제가 있는 후보자에 대한 지명을 철회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이보다 더 "내로남불"이라는 말과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또 있을까?

집권 초기의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높은 지지도에 도취되어, 야당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오직 자기만 옳다는 독선에 빠진 모습은 그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전직 대통령의 모습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명백한 잘못 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협치를 강조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내외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산적해있는지 모를 리 없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시행착오를 감수할 여유가 없다. 감성팔이는 연예인들이 할 일이다. 정치인은 정치를 해야 한다. 하물며, 정치인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과 대통령 모두의 성공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의 변화를 기대한다.

Post20170411

Title: "의미불명"
Date: 11 APR 2017
Tags: +language +단어 @의미

최근 충치 치료를 했다. 치료를 받은 직후에는 이가 시리고 욱신거려서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불현듯, 내가 "이가 시리다" 또는 "욱신거리다" 라고 표현하는 그 느낌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느낌과 동일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용하는 맛을 표현하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맛은 비교적 명확히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부모가 말을 배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그 사탕의 맛을 표현할 때는 "달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가르칠 수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사탕의 맛은 먹는 사람 누구에게나 비교적 일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부모가 "달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맛은 아이가 배워서 알게 되는 "달다"라는 단어가 표현하는 맛과 동일하다.

그런데, 다양한 종류의 통증을 표현하는 단어는 상황이 좀 다르다. 물론 단순히 "아프다"라는 단어는 쉽게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이가 시리다", "욱신거리다"와 같은 단어들뿐만 아니라 "뻐근하다", "쓰라리다" 등등 복잡미묘한 통증을 표현하는 단어는 아이에게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인위적으로 아이가 느끼도록 할 방법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느낌을 아이에게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욱신거리다"라는 단어를 외국인에게 설명한다고 상상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결국, 내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욱신거리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걸 듣는 다른 사람들이 연상하는 느낌은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경험을 통해 배운 바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어떻게 그런 단어들을 배웠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 추측컨대, 이와 같은 단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동일한 단어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Post20170410

Title: "재벌 2세"
Date: 10 APR 2017
Tags: +social +재벌 @인성

돈이든 권력이든, 뭔가 "힘"을 가진 인간은 아무래도 겸손함과 자제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예를 들어보자. 내 직업은 영업사원이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소매 영업은 아니고, 거래처의 "구매 담당자"를 상대하는 B2B 영업사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거래처 구매 담당자는 "갑"이고, 나는 "을"이다. 그런데, 장기간 구매 담당자로 일해온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심각한 정신적 결함을 드러낸다. 본인이 항상 옳다고 믿고, 상대방은 나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내 의사에 따라 뭐든지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구매 담당자가 잘못을 해도 문제를 제기하는 "을"은 거의 없기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갑질"에 익숙해진 것이다. (물론, 개인의 인성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전혀 없는 구매 담당자는 본 적이 없다.)

서론이 길었는데, 사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재벌 2세(또는 3세)들에 대한 것이다. 조그만 중소기업의 일개 구매 담당자 조차도 자신의 권한에 도취되어 추태를 보이는데, 국가 경제를 주무르는 거대 재벌가의 2세들은 과연 어떨까? 아쉽게도 내가 아는 지인 중에 재벌 2세는 없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 직접 보고 들어 아는 바는 없다. 하지만, 예로 든 거래처 구매 담당자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지위와 엄청난 부를 가지고 살아온 그들의 모습은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할 것 같다.

젊을 때 상당한 고생도 했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도 했고 그래서 결국 현재의 위치에 오른 창업주들과 달리, 재벌 2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위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다. 단순히 돈만 많은 것이 아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자기가 모시는 재벌 총수의 자녀에게 싫은 소리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나이가 차면 아버지의 재산과 직책을 물려받고 후계자가 된다. 그들의 삶에는 정상적인 인성 교육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인성 교육은 단순히 말로 설명하고 책을 읽도록 하는 것으로만 성취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 행동의 옳고 그름에 따라 칭찬을 받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하면서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서 정상적인 인성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접하는 재벌 2세들의 일탈 행동은, 이런 성장 과정을 고려할 때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커온 그들을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법을 어기면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본인의 선택과 관계 없이 가지게 된 인성적인 결함에 대해서 도덕적인 비난을 할 수 있을까? 이건 좀 애매한 면이 있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가끔 그런 상상을 해본다. 내가 재벌 총수라면 자식을 어떻게 교육시킬까? 나에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 자식을 안하무인의 망나니로 키우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 하면 겸손함과 자제력을 갖춘 정상적인 인성을 형성시켜 줄 수 있을까?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보통 사람들도 자식 교육 측면에서 한번쯤 고민해볼 만한 질문이 아닐까 한다.

Post20170405

Title: "차악"
Date: 05 APR 2017
Tags: +politics +선거 @차악

우리나라 정치는 크게 진보와 보수 두가지 흐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아니,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좀 더 극단적인 경향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진보 진영은 평등과 분배 등의 가치를 중시하고, 보수 측에서는 자유와 성장에 무게를 둔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경험하면서 우리나라의 보수는 사실상 지리멸렬한 상태다. 개인적으로 보수의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현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이 안타깝다는 뜻이 아니다. 박근혜와 같은 부적절한 정치인이 (사실은 보수의 가치와 상관이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의 이름을 걸고 대통령이 됐다가 결국은 문제를 일으키고 탄핵됨으로써, 오히려 보수를 궤멸시켜버린 현 상황이 아쉽다는 뜻이다.

물론, 이 부분은 보수 진영 전체의 책임도 크다. 정경유착, 부패, 불공정, 불평등 같은 것들은 사실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와 상관 없이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청산해야 할 대상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바로 "적폐"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이와 같은 적폐들을 야기한 사람들이 주로 보수 측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즉, 이런 적폐들은 보수의 가치와 상관 없는 문제들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보수와 적폐가 동일한 의미처럼 받아들여지게 됐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진보 측 정치인들이 이런 문제로부터 더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더 뛰어난 성품과 청렴함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나라 현대사 전반에 걸쳐서 그들이 권력을 잡았던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런 적폐를 만들어낼 기회 자체가 적었을 뿐이다. (기회만 있었다면, 보수 정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쨌든, 결과만 놓고 볼 때는, 진보 정치인들이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더 적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보수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다. 바꿔말하면, 진보의 가치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의 우리나라"에서는 진보 보다는 보수의 가치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에 보수 측은 "대체로 맞는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 말을 지키지 않는 나쁜 사람들"이고, 진보 측은 "사람은 비교적 착하지만, 어느게 맞고 어느게 틀린지 구분도 하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의 판세를 보면, 그 "나쁜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멍청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당선 가능한 보수 후보는 전무하고, 진보 측에서 그나마 덜 편향된 후보를 뽑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현 상황이 매우 우려스럽다.

Post20170104

Title: "인생의 주연과 조연"
Date: 04 JAN 2017
Tags: +human +주인공 @착각

인생을 연극이나 영화에 비유한다면, 세상 사람의 90%는 조연 또는 단역이다. 소수의 성공한 사람만이 주연 배우라 말할 수 있다. 즉, 자신의 능력 또는 주변의 환경 덕에 주연이 될 수 있다면 물론 좋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조연 또는 단역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쉽지만 그게 현실이다. 모든 사람이 주연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성인들이 조연 또는 단역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 역시 오직 주연이 되라는 말만 들으며 성장한다. 그 아이들이 현실의 벽을 깨달을 나이가 되면, 당연히 큰 혼란을 느끼게 되고 꽤나 힘든 적응 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항상 자신이 주연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주변으로부터 조연 또는 단역 취급을 받게 되면, 자신의 부족한 능력으로 어떻게든 주연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게 되고, 그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좌절과 실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주연으로 인정받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실패하고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너는 주연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조연 또는 단역에 머물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 때문에 그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 역시 되어있어야 한다"는 점을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자기 자식이 무조건 최고라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부모가 그런 교육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성인들 역시 최대한 빨리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해야 함은 물론이다.

Post20150501

Title: "How?"
Date: 01 MAY 2015
Tags: +misc +방법 @무의미

나는 종합격투기를 매우 좋아한다. 흔히 '이종격투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초창기에는 복싱 선수와 태권도 선수의 대결, 유도 선수와 레슬링 선수의 대결 등등 "서로 다른 투기종목 선수들간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이종격투기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요즘은 여러 종목의 장점들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기술체계를 갖춘 별도의 종목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종합격투기'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리고 몇년전, 종합격투기 경기를 보다가 재미있는 말을 듣게 됐다. 한 선수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해설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아, 상대 선수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자신의 공격을 좀 더 많이 적중시키면, 경기를 훨씬 유리하게 풀어갈 수 있을텐데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격투기에서 잘 막고 잘 때리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은 세살 먹은 아이도 안다. 지고 있는 선수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잘 막고 잘 때릴 수 있느냐다. 몰라서 안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의 거센 공격과 철저한 방어때문에 알면서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해설자의 말은 100% 맞는 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의미 없는 말이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경험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매우 자주 접하게 된다.

난 기독교인이라 매주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의 설교는 대부분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복을 받는다"는 비슷한 요지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는 기독교 신자들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없다. 다만, 그들 인생에서 겪는 수많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유혹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어려움과 유혹을 극복하고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방법론적인 내용의 설교를 해야한다. 물론,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님은 흔치 않다.

비슷한 경우는 직장생활에서도 경험한다. 영업사원들은 매출증대방안을 제출하라는 요구를 자주 받게 된다. 그런데 그 방안이라는 것이 의미없는 말장난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영업사원들은 "매출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신규 아이템의 판매를 확대하고 신규 시장 개척에 힘써야 합니다" 따위의 말을 자주 하는데, 분명 맞는 말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신규 아이템 판매를 늘리고 새로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론적으로,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듣기에만 좋은 말들을 의미없이 나열하기 보다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Post20150420

Title: "빈부격차/ 갑을관계/ 스펙차별"
Date: 20 APR 2015
Tags: +social +양극화 @포퓰리즘

최근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복지 강화, 갑을관계에서의 갑질 방지, 학벌 및 스펙 위주의 직원 채용 관행 폐지 등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듣게 된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그것이 꼭 옳은 방향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우선 빈부격차 해소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는 필요악이다. 모두가 다같이 잘 사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사람들은 누구나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고, 어찌 보면 빈부격차야말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복지"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이 도태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정글과 인간 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니까. 그런데, 최근 이 복지라는 개념에 심각한 오해가 생긴 것 같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기본적인 원칙은 개개인의 구성원이 경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는, 도저히 경쟁이 불가능한 처지에 있는 일부 계층에 대해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게 되면, 사회 구성원들의 동기부여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언론 등을 통해 보여지는 최근의 추세는, 복지라는 것이 "못사는 사람도 잘사는 사람과 동일한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즉, 입을 옷이 없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옷가지를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자들이 입는 더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옳은 방향일까?

갑을관계 역시 비슷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든 갑을관계는 존재해왔다. 더 큰 협상력을 가진 쪽이 그렇지 못한 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돈이든 지위든, 자신이 가진 "갑"으로서의 위치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사회가 운영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 중의 하나다. 이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또한,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을이 갑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면 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거나 갑의 요구를 무작정 들어줄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비록 겉으로는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을 역시 갑을관계를 통해 이익을 얻게 된다. 그 어떤 을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을 갑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갑의 행동이 도를 지나쳐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국가의 개입과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 바로 이러한 경우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갑을관계까지 모두 척결해야 할 비합리적인 관행으로 몰아간다면, 이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벌과 스펙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요즘 스펙차별​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다. 학벌 및 스펙과 개인의 능력은 별개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여론에 못 이겨 "표면적으로는" 학벌과 스펙을 보지 않는 회사들도 늘어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일단, 학벌 및 스펙과 실질적인 능력이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나도 동의한다. 문제는 "100%"는 아닐지 몰라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90% 이상이 아닐까 한다.) 학벌과 스펙은, 결국 그 사람이 "학창시절에 공부를 얼마나 잘했고 어떤 성취를 이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즉, 학벌과 스펙을 갖춘 사람은, 최소한 "지적 능력"과 "성실성" 두 가지는 검증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학벌과 스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나?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어차피 제한적인 자기소개서나 면접을 통해서는 한 인재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뭔가 객관적인 지표가 필요한데, 학벌이나 스펙 외에는 딱히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표가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결국 학벌과 스펙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이는 완벽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다. 학벌 및 스펙 위주의 채용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고졸 출신이 SKY 졸업자보다 뛰어난 인재일 확률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나? TOEIC 500점인 사람이 TOEIC 900점인 사람보다 영어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학벌이나 스펙을 무시한다면, 입사지원자들을 평가할 뭔가 다른 기준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나? 미사여구로 장식한 자기소개서나, 고작 20~30분 가량의 면접 시간 동안 보여주는 말솜씨 따위가, 십여 년간의 노력으로 성취한 학벌과 스펙 보다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나?

결론적으로 빈부격차, 갑을관계, 스펙차별 등이 무조건 청산해야 할 사회 암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정치인들의 "포퓰리즘" 행태다.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갑보다는 을이, 고스펙자보다는 저스펙자의 숫자가 많은 것이 현실이고, 표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정책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인기를 끌만 한 정책에 매몰되는 정치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다수결 또는 여론에 따라 판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지지하는 사람의 숫자와 관계 없이 내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 PS: 이런 글을 쓰고 보니, 마치 내가 부잣집에서 태어나 명문대 졸업하고 갑질만 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오해받을지 모르겠다. 물론 전혀 아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중위권 대학 졸업하고 전형적인 을의 역할인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다만, 내 처지와 상관 없이 어느 것이 옳은 방향인지 말하고 싶었다.

Post20140515

Title: "삼위일체"
Date: 15 MAY 2014
Tags: +religion +기독교 @의문

난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사실 그 누구도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면, 교회에서 흔히 듣게 되는 답변은 "이해하려 하지 말고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알지 못하면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얘기인가? 최소한 나에게는 어려운 요구다.

기독교의 여러 교리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그 유명한 삼위일체론이다. 너무 복잡한 내용이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니 설명할 능력도 안되지만, 굳이 요약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내용이다. 일단, 문장의 표면적인 의미부터 논리적이지 않다. 더 이상한 점은, 성경 내에 삼위일체라는 개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혹자는, 성경과 상관 없이 후대에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진 교리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 또는 교단은 기독교 내에서 이단으로 취급받는다.

실제 성경을 읽어보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로 느껴지지 않는다. 각각 별개의 신으로 느껴질 뿐이다.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 조차 마음속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순서로 위계질서가 잡혀있다는 뜻이다. 성부와 성자는 두명의 신이고, 성령은 신이라기 보다는 메신저에 가까운 느낌이다. 즉, 일반적인 기독교인들 조차 일종의 다신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 것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 이단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서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 6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오랜 세월에 걸쳐 기록됐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서로 상충하는 문장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뿌리인 성경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러한 논리적 오류들은 뭔가 그럴듯한 설명을 붙여 말이 되는 것으로 포장하곤 한다.

예를 들면 1권에 "A는 B이다"라는 문장이 있고, 66권에 "A는 B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연히 논리적 오류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문장 자체로는 상충하는 듯 보이지만, 각 문장에서 B가 상징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논리적 오류라고 볼 수 없다. 그 이면을 따져보면 결국 같은 의미다."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삼위일체론 역시 성경의 수많은 다른 부분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논리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불경스런 의심을 품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Post20130318

Title: "무기와 인간 Arms and the Man"
Date: 18 MAR 2013
Tags: +book +버나드쇼 @리뷰

<무기와 인간 Arms and the Man> -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원래 독서를 즐기는 편인데, 최근에는 희곡을 읽는 것에 빠져있다. 그리고 오늘 조지 버나드 쇼의 <무기와 인간>을 읽었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 모든 것을 집어넣어야 하는 희곡의 특성상, 다소 무리한 전개로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마치 현대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재미있고 유쾌한 작품이었다. (감히 조지 버나드 쇼의 작품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인적인 느낌을 말했을 뿐...)

다만, 소설이든 희곡이든 뭔가를 읽게 되면 가끔은 주인공 보다 주변의 인물들에게 관심이 갈 때가 있다. 조금 씁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니콜라의 존재다. 가장 우월한 인물로 묘사된 블룬칠리와 루카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 (블룬칠리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는 부와 지위를 모두 가진 인물이었고, 루카는 지위는 낮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고 재치있는 여자였다.) 비록 그다지 현명하지는 않지만 높은 신분의 라이나와 세르지우스는, 잃은 것도 있고 얻은 것도 있기 때문에 크게 손해본 것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던 니콜라는, 낮은 지위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가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맘이 아프다.

오래전에 본 <미녀는 괴로워>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표면적으로는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듯한 내용이었지만, 결국 여주인공이 일과 사랑에 모두 성공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성형수술을 통해 얻게 된 아름다운 외모 덕분이다. <무기와 인간>도 비슷하다. 표면적으로는 상류층의 무지함과 속물 근성을 비판하는 듯 하지만, 결국 막대한 부를 가진 블룬칠리는 사랑을 얻었고 루카의 성공 역시 부와 지위를 동반한다. 사랑을 잃고 힘없이 체념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은 가진 것 없는 니콜라였다.

조지 버나드 쇼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 조차도 비중이 크지 않은 하인 니콜라의 처지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것인지 알 방법은 없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씁쓸함이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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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20080323

Title: "가위"
Date: 23 MAR 2008
Tags: +personal +가위 @악몽

Post20061019

Title: "Chess"
Date: 19 OCT 2006
Tags: +game +체스 @영속성

Post20060516

Title: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
Date: 16 MAY 2006
Tags: +religion +기독교 @의문

Post20080323

Title: "가위"
Date: 23 MAR 2008
Tags: +personal +가위 @악몽

반년 전까지만 해도, 내 평생 가위에 눌려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말로만 들었을 뿐 경험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경험자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진다.

  1. 정신은 깨어있는데,
  2.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고 눈도 떠지지 않는다.
  3.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어떤 존재가 느껴진다.

솔직히 직접 겪어본 게 아니라 별로 미덥지 않았었다. 그냥 조금 특이한 꿈을 꾼 것인데, 괜히들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약 반년 전...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위에 눌리는 경험을 해봤다.

그날 밤 잠을 자던 중에 무언가가 내 몸 위에 얹혀있는 느낌 때문에 잠에서 깼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자의 몸이 내 몸 위로 포개지는 느낌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눈은 떠지지 않았지만 정신도 말짱했고 느낌도 너무나 뚜렷했다. 내가 기혼자였다면, 당연히 아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난 독신이고, 한밤중에 우리집에 숨어들어 나를 덮칠만한(?) 여자도 없기 때문에, 눈이 떠지지 않는 중에도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 그 무언가가 날 끌어올려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서서히 상체가 일으켜지는 가운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일으켜지면 뭔가 안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기독교인인 내 입에서는 간신히 "주여..."라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 말과 동시에 눈이 떠지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끝나버렸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특징이 모두 나타나는 전형적인 가위눌림이다. 그날 이후 나도 가위눌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Post20061019

Title: "Chess"
Date: 19 OCT 2006
Tags: +game +체스 @영속성

나는 게임을 정말 좋아한다. 비록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게임이야말로 가장 진보된 형태의 엔터테인먼트 도구라고 생각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게임계의 변화 속도가 그 어느 문화 콘텐츠보다 빠르다는 점이다. 수많은 게임들이 제작되고 급격히 사라져 간다.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 주는 명작 게임이라도, 길게 잡아 몇 년 안에 모두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다. 플랫폼도 몇 년 주기로 계속 변화한다. 가장 첨단의 기술들이 난무하는 게임계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집착이 강한 나에게는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서 컴퓨터 게임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바둑, 장기, 체스처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왔고 전통 있는 보드게임들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바둑, 장기, 체스 등을 비슷한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장기와 체스는 같은 기원을 가진 게임으로서, 인도에서 만들어진 후에 동서로 전파되어 각각 장기와 체스가 됐다. 결과적으로 세부적인 룰은 좀 다르지만, 그 기본 개념은 거의 같은 게임이다. (확실한 게 아니라서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바둑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된 전혀 다른 게임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가 보기엔 바둑이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게임이다. 단, 그만큼 더 어렵고 초보자에겐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 그에 비해 장기나 체스는 상당한 깊이와 재미를 갖췄음에도, 비교적 배우기 쉽다. 또 보다 전쟁의 형태에 가까워서 바둑보다 더 박진감이 있다. 참고로 바둑에서는 돌의 이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 매우 정적이다.

결국 체스를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장기와 체스가 거의 같은 게임이라면, 이왕이면 멋있어 보이는 체스가 나을 것 같다... 체스를 공부할 책도 구입했고, 조만간 체스 보드도 살 생각이다. 굳이 체스 세트가 없어도 컴퓨터와 인터넷만으로도 얼마든지 체스를 즐길 수 있다.

어느 게임이나 마찬가지지만, 처음에는 재미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어렵게만 생각될 것이다. 특히 바둑이나 장기, 체스 같이 오래된 역사를 가진 게임들은 그간에 정립된 룰과 이론을 학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체스가 컴퓨터 게임들처럼 몇 년 사이에 잊혀질 일은 없으니 시간은 많다. 이번 기회에 나도 조금은 고상해 보이는 취미를 가져보자.

# PS: 장기와 체스를 비교했을 때, 장기의 가장 큰 단점은 "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해 각각의 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다른 규칙을 가지고 있다. 물론, 기본 개념은 공유하지만 세부 규칙이 다르면 당연히 함께 플레이할 수 없다. 그냥 그들만의 리그인 것이다. 반면에 체스는 전 세계에서 공통의 룰을 사용하고, 결과적으로 장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체계화 되어 있다. 이는 매우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Post20060516

Title: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
Date: 16 MAY 2006
Tags: +religion +기독교 @의문

나는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당연히 기독교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아마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분명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지만, 이해할 수 없고 궁금한 점이 많이 있다.

언제인지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기독교에 대해 어떤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러다가 몇년전에 이문열 씨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 소설을 읽고 나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본격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의문은 인간의 "자유 의지" 및 "죄의 존재"와 "책임 소재"에 관한 것이다.

그 소설에는,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가 랍비인 아버지에게 "교사자"와 "하수인" 중 누가 더 큰 죄인인지에 대해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교사자가 더 큰 죄인이라고 대답했고, 뒤이어 아하스 페르츠는 죄인이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강 그런 내용이었다. 어쨌든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오류가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을 할 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이때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다시말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말과 같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간이 무언가 선택을 하려고 할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분명 인간이 어떤 선택할지 알고 계실텐데, 만약 인간이 하나님이 미리 알고계시는 것과 다른 선택을 한다면 하나님이 틀린게 되므로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신 바로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다시말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인간이 악을 행하려고 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미리 알고 계시고 막을 수 있으면서 막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의도이다. 단순히 말해서, 못막는 것이 아니라 막을 수 있는데도 안막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그렇게 되길 원한다는 뜻이 된다. 결국 나는, 인간은 자신이 무언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어떤 사소한 선택도 미리 정해진 계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전혀 없고 하나님의 계획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자녀를 미리 정해놓으셨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 그러나 그 선택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저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이며, 선택받지 못한 악인들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뜻대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악인은 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지옥에 가야할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Shakespeare의 비극인 Hamlet을 예로 들어보자. Hamlet의 숙부 Claudius가 Hamlet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다. 어떤 배우가 극중의 Claudius 역을 맡아 Hamlet의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 즉 악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연기한다고 가정하자. 과연 그 배우에게 죄가 있을까? 그는 단지 작가의 계획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악인의 역할이 주어졌고, 그래서 악행을 연기할 뿐이다. 그 배우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다.

이번에는 Hamlet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흔히 Hamlet을 우유부단함의 대명사로 생각한다. 그의 우유부단함이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가, 기도하고 있는 무방비상태의 Claudius를 죽여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부분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만약 Hamlet이 그때 Claudius를 죽였다면 이후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Hamlet에게 만약이란 없다. Hamlet은 기도하는 Claudius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하는데, 그것은 그가 고민하여 선택한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작가인 Shakespeare에 의해 정해져 있는 행동을 한 것 뿐이다. 그의 선택처럼 보일뿐, 사실은 그의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Shakespeare와 Hamlet 또는 Claudius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읽은 데이빗 흄(David Hume)의 인용문에서 "하나님은 선하시거나(OR) 전능하실 순 있지만, 선하시고(AND) 전능하실 순 없다. 이 세상에 죄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남겨두시는 것이거나, 전능하시지만 선하지 않으셔서 없애지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동시에 전능하시다면 이 세상의 죄는 존재할 수 없어야 한다."라는 요지의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이 또한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교회에 다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에 대해 그 어떠한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게 하시고, 가슴 아프게도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죽도록 하셨을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렇게 하셨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텐데... 하나님은 죄를 필요로 하신 것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흑백이 대조를 이루면 흰색이 더욱 희게 보이듯,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죄가 존재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죄의 존재 없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그리 길지 않은 내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깨달아 알고 있다. 그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성경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러 믿기 힘든 기적들도, 비기독교인들에게는 허황된 듯 보일 지 모르지만,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확실히 아니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반기독교적인 의문을 품는 것은 결코 기독교에 대해 흠집을 내고 배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을 깨달아 더 잘 믿기 위해서이다. 물론 전에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다른 사람들에게 한 적이 있다. 내가 들은 대답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으니 그냥 믿고 넘어가라는 무책임한 대답뿐이었다. 나는 그런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이 아닌, 비기독교인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대답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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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My Love, My Fiance, and My Wife
Monica Renee Villegas
26 OCT 2024

My love, Monica!

Finally, it is your 35th birthday.

It is amazing that we spent 6 years together, from those 35 years, loving and supporting each other. You have always been so kind and sweet to me and I am enjoying the happiest moments of my life, each and everyday.

But, at the same time, I feel sorry because I doubt I deserve such unlimited love. I am trying to be a better man for you but it has never been successful.

Very soon, you will be my wife and I will be your husband. And, I promise you I will make you happy. I will do anything for you. You are my whole world. And, I want my world to be a happy place. I will do my best.

By the way, you do not have to "try" anything and get stressed because you are already perfect. I am blessed to have you. Thank you for coming into my life.

I love you. Happy birthday!

Choungnam